불길 속의 대면
기주는 분석기를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잿더미를 밟아 껐다. 새벽 여섯 시, 북항 공업단지 초입의 대한케미칼 사무실은 눅눅한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기름때에 절은 유리창 너머로 형광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졌다.
대한케미칼 사장인 정우진은 말끔한 회색 정장 차림으로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틈으로 기름 냄새와 고급 담배 향이 뒤섞여 풍겼다.
"이 시간에 불청객이라니, SIU가 그렇게 한가합니까?"
정우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차갑게 웃었다. 목소리에는 뼈가 박혀 있었다.
"서해창고 잿더미 바닥에서 긁어낸 거다. 연소 지연용 타르에 톨루엔을 섞었더군."
기주가 품에서 휴대용 분석기의 기록지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종이 표면에 흑연 같은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투자자일 뿐입니다. 근거 없는 억측으로 영업을 방해하면 법적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 텐데요. 당신 같은 사람 하나 치우는 건 일도 아니야."
정우진의 눈매가 굳어지며 날 선 살기가 번뜩였다. 위협은 노골적이었다. 기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코트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불에 반쯤 녹아내린 강화 플라스틱 덩어리. 금속 필터 연결부 안쪽에 뭉개진 일련번호가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10년 전 서해창고 참사 현장에서 실종된 동료가 쓰던 특수 방화 마스크의 파편이었다. 묵직한 쇠 냄새와 타버린 살갗의 잔향이 탁자 위로 번졌다.
정우진의 시선이 파편의 각인에 멎었다. 찻잔을 잡던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유롭던 입꼬리가 굳게 닫히며 핏기가 가셨다.
"이게 어디서 나왔는지 당신이 제일 잘 알 텐데."
기주의 목소리는 가라앉은 잿가루처럼 무거웠다. 정우진은 숨을 죽인 채 파편을 쏘아보더니, 이내 헛기침을 하며 옷깃을 매만졌다.
"…좋습니다. 현장 출입증을 내드리죠. 사흘 줍니다. 그 이상은 관할서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물러섰으나 타협은 아니었다. 칼자루를 쥔 자의 유예에 불과했다. 기주는 말없이 파편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새벽의 검은 바닷바람이 덜컹거리는 창문 틈새로 서늘하게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