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다행이네요. 잘 어울려요, 수아 씨."
내 목소리는 평온했다.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기이할 정도로 잔잔했다.
수아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내가 화를 내거나, 당장 내 구두를 벗으라며 소리를 지를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반응이 너무도 덤덤하자, 그녀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 이내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비틀려 올라갔다.
"사모님이 마음 넓게 이해해 주시니 정말 감사해요. 전 또 혹시라도 기분 나빠 하실까 봐 걱정했거든요."
"기분 나쁠 게 뭐 있어요. 잘 어울리는 사람 주인이 되는 게 맞죠. 안 그래요?"
"그럼요. 물건이든, 자리든…… 원래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니까요."
수아는 보란 듯이 구두를 벗어 현관 신발장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두었다.
정확히 내 남편 도현의 구두 바로 옆이었다. 마치 한 쌍의 부부 신발처럼 나란히 놓인 모양새가 기괴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억눌렀다.
전직 로펌 조사원으로서 수많은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들을 목격해 왔다. 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기생충 같은 존재들.
하지만 내 집 안에서, 내 딸을 도구 삼아 이런 짓을 벌이는 괴물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수아. 진짜 한수아가 요양원에 누워 있다면, 넌 대체 누구지?'
가짜 신분 뒤에 숨은 괴물의 진짜 낯짝을 반드시 벗겨내리라.
새벽 1시 30분.
도현은 늦은 회식 끝에 술에 취해 들어와 안방 침대에서 곯아떨어졌다. 거실 너머 수아의 방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집 안 전체가 무덤 같은 침묵에 잠긴 시간.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 서랍 깊숙이 숨겨두었던 고급 화장품 케이스를 꺼냈다.
그 안에서 잠자고 있던 세 개의 초소형 무선 카메라가 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동전 크기만 한 검은색의 정교한 기기들.
나는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 어둠 속에서도 내 감각은 날카롭게 살아 움직였다.
로펌 조사원 시절, 불법 도청과 감시 카메라를 찾아내고 반대로 설치하는 현장을 수없이 참관했었다. 전문가들의 손길을 눈여겨보아 둔 보람이 이제야 빛을 발했다.
첫 번째 카메라는 거실 책장 위, 무성하게 자란 조화 화분 속에 교묘하게 숨겼다. 거실 전체와 안방 문 앞을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는 각도였다.
두 번째 카메라는 주방 상부장 아래, 자석식 타이머처럼 보이는 장식물 뒤에 부착했다. 가스레인지와 식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세 번째 카메라는 복도 끝, 서아의 방과 수아의 방 사이에 걸린 액자의 프레임 모서리에 심었다. 아주 미세한 틈새라 육안으로는 절대 찾아낼 수 없었다.
안방으로 돌아온 나는 스마트폰을 켜고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했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끝에 세 개의 화면이 깨끗하게 분할되어 나타났다. 야간 적외선 모드가 작동하며 어둠 속의 거실과 주방이 선명하게 비쳤다.
"이제 시작이야, 가짜 씨."
나는 화면 속 고요한 집안 풍경을 노려보며 차갑게 속삭였다.
다음 날 저녁.
도현이 퇴근해 돌아왔을 때, 집 안에는 군침 도는 냄새가 가득했다.
식탁 위에는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소고기전골과 정갈하게 담긴 갈비찜, 그리고 보기만 해도 손이 많이 간 듯한 밑반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와, 오늘 무슨 날이야? 엄청 푸짐하네."
도현이 넥타이를 풀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른 수아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다.
"박 팀장님 요즘 회사 일로 많이 힘들어 보이셔서요. 사모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대접하라고 하셨어요."
"정말? 유진이 당신이?"
도현이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아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요. 당신 요즘 밤낮없이 고생하니까 맛있는 것 좀 먹이고 싶었어요."
"고마워. 잘 먹을게."
도현이 숟가락을 들고 전골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역시 수아 씨 손맛은 알아줘야 해. 당신도 좀 먹어봐, 유진아."
"……응."
내가 숟가락을 들려는 순간, 옆에 서 있던 수아가 돌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저…… 박 팀장님. 실은…… 제가 한 가지 조심스럽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도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일인데요, 수아 씨?"
수아는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힐끔거렸다. 마치 무서운 사람의 눈치를 보는 듯한, 아주 정교하게 계산된 연기였다.
"아니에요. 제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말해 봐요. 괜찮으니까."
도현의 목소리에 은근한 긴장감이 서렸다. 수아는 한숨을 폭 내쉬며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은…… 오늘 낮에 부엌에서 불이 날 뻔했어요."
"불이요?!"
도현이 놀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네. 서아를 데리고 방에 있는데 갑자기 타는 냄새가 나서 나와 보니까, 가스레인지 위에 빈 냄비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더라고요. 사모님께서 국을 끓이시려다가 깜빡 켜놓고 방에 들어가신 모양이에요. 조금만 늦었어도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나는 밥공기를 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오늘 낮에 나는 주방 근처에는 가 보지도 않았다. 철저한 날조였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멍청하고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소리예요, 수아 씨? 난 오늘 낮에 가스레인지를 켠 적이 없는데……."
"아……."
수아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였다. 그녀는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해요, 사모님. 제가…… 제가 잘못 보았나 봐요. 사모님이 그러실 리가 없는데, 제 착각이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명백한 피해자 코스프레.
도현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유진아."
"도현 씨, 진짜 아니야. 나 오늘 하루 종일 안방에만 있었어."
"하아……."
도현은 수아를 무조건 믿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아내에 대한 깊은 피로감과 불신이었다.
"당신 요즘 상태 안 좋은 거 알아. 잠도 못 자고, 사소한 것도 계속 깜빡하잖아. 지난번에도 내 서류 가방 어디 뒀냐고 나한테 소리 질러 놓고선, 결국 당신이 안방 옷장에 넣어둔 거 기억 안 나?"
그것 역시 수아가 몰래 숨겨두었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현의 입장에서는 최근 몇 달간 이어진 내 육아 우울증과 신경과민이 더 객관적인 증거로 다가왔을 터였다.
"그건……."
"수아 씨가 굳이 이런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득이 뭐가 있어? 당신 걱정해서 한 말이잖아. 당신이 요즘 너무 힘들어하니까 불안해서 그래."
도현의 조목조목 따지는 말투에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아는 내 남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수아가 품에서 작은 비닐봉지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비닐봉지 안에는 껍질을 벗긴 땅콩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요. 아까 낮에 사모님께서 서아에게 먹이려고 하시는 걸 제가 겨우 말렸어요. 서아가 아주 약하긴 하지만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잖아요. 사모님께서 요즘 너무 피곤하셔서 그런지, 자꾸 중요한 걸 잊으시는 것 같아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내 딸, 서아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수작질.
서아의 견과류 알레르기는 내가 가장 예민하게 관리하는 부분이었다. 내가 서아에게 땅콩을 먹이려 했다니.
이건 단순한 가스라이팅을 넘어 나를 '아동 학대 및 방임범'으로 만들려는 음모였다.
"너…… 미쳤어?"
나도 모르게 이성이 끊어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사모님……?"
"너 미쳤냐고! 내가 서아한테 땅콩을 먹이려 했다고? 네가 어떻게 그런 미친 거짓말을 해!"
쾅!
나는 식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서아의 안전에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이성을 잃는다. 그게 내 유일한 역린이었다.
"유진아, 진정해!"
도현이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당화이 뒤섞여 있었다.
"이거 놔! 도현 씨, 저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안 들려? 서아한테 땅콩이라니! 내가 왜 내 딸한테 독 약을 먹여!"
"사모님, 죄송해요! 제가 오해한 것 같아요! 그냥 사모님이 식탁 위에 땅콩을 두셨길래…… 전 서아 손에 닿을까 봐 불안해서 그런 거예요!"
수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가련하고 헌신적인 시터의 완벽한 모습이었다.
"유진아, 제발 그만 좀 해! 왜 자꾸 일을 크게 만들어!"
도현이 나를 밀치듯 제지하며 수아를 일으켜 세웠다.
"수아 씨는 걱정돼서 한 말이잖아! 당신 요즘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병원 상담이라도 받아보자고 했을 때 들었어야 했어. 어떻게 애가 있는 집에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쳐?"
도현은 나를 맹신하지 않는 만큼, 지금 내 거친 반응을 '정신적 붕괴'의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깊은 혐오와 걱정.
그 비참한 시선이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흐윽…… 사모님, 정말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차라리 제가 이 집에서 나갈게요……."
수아가 흐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우는 얼굴 너머로, 수아의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울음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늘하고 오만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봐, 당신 남편조차 당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잖아.'
그 눈빛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억울함과 분노가 밀려왔다. 당장이라도 수아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전직 로펌 조사원으로서의 차가운 이성이 소리쳤다.
'안 돼. 여기서 더 날뛰면 저 여자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꼴이야.'
저 괴물은 내가 미쳐 날뛰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나를 완전히 매장할 수 있으니까.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그리고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억울하고 유약한 아내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도현 씨."
내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정말…… 내가 정말 그랬어? 난 기억이 안 나는데…… 가스레인지도, 땅콩도……."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는 시늉을 했다.
도현의 눈빛이 차가운 불신에서 안타까움과 씁쓸함으로 변했다.
"유진아, 일단 방에 들어가서 쉬어. 수아 씨, 미안해요. 우리 아내가 요즘 많이 예민해서 그래요."
"아니에요, 박 팀장님…… 사모님이 안정을 취하시는 게 먼저예요."
수아가 나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길이 내 어깨에 닿는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나는 억지로 참아냈다.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복도 끝 벽면에 걸린 액자.
그 프레임 틈새에 숨겨진 초소형 카메라의 렌즈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실컷 비웃어 둬.'
오늘 주방과 거실에서 일어난 모든 상황은 내 스마트폰을 통해 고스란히 녹화되고 있었다.
네가 지어낸 거짓말, 네가 지은 기괴한 미소까지 전부 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눈물을 닦아내자, 내 얼굴에 차갑고 잔혹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덫은 완벽하게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