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를 노리는 완벽한 시터 — 3화

3화. 빼앗긴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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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스마트폰 화면이 어두워지자, 주방에는 다시 고요한 어둠이 가라앉았다.

가만히 심호흡을 했다. 차갑고 이성적인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수수방관하며 피폐해지던 뇌 세포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한수아.’

그 여자는 괴물이다.

동시에 지극히 치밀하고 영악한 소시오패스였다.

그렇다면 나 역시 철저해져야 했다.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흥분하는 순간, 가스라이팅의 프레임에 갇혀 미친년이 되는 건 나니까.

나는 발소리를 죽여 안방을 지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도현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코를 골고 있었고, 건너편 수아의 방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적막한 드레스룸의 불을 켜지 않은 채, 스마트폰 플래시를 아주 약하게 켜서 바닥을 비추었다.

전직 로펌 조사원 시절, 나는 주로 불륜이나 기업 기밀 유출 사건의 정황 증거를 수집했다. 사람들은 아무리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려 해도 반드시 사소한 단서를 남긴다. 하물며 매일 같이 부대끼는 집 안이라면 더더욱.

나는 내 옷들이 걸린 행거 앞으로 다가갔다.

수아는 내 옷을 훔쳐 입고 거울을 보며 내 말투를 연습했다. 그렇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먼저 실크 블라우스와 트위드 원피스들이 걸린 구역을 살폈다.

얼핏 보기에는 백화점 매장처럼 칼같이 정렬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나는 옷을 걸 때 항상 옷걸이의 고리 방향이 안쪽을 향하게 정돈한다. 내 오랜 강박 같은 습관이었다.

그런데 가장 아끼는 크림색 실크 블라우스의 옷걸이 고리만 바깥쪽을 향해 있었다.

블라우스를 꺼내 들었다.

어깨 부분의 미세한 주름.

수아는 나보다 어깨 골격이 조금 더 넓다. 탄력 있는 실크 소재라 얼핏 보면 티가 안 나지만, 겨드랑이 안쪽 봉제선이 미세하게 늘어나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냄새였다.

코를 가까이 대자, 옷깃에서 아주 미세한 잔향이 풍겼다.

묵직한 우디 향과 쌉싸름한 장미 향이 섞인 딥티크 니치 향수.

내가 일 년에 한두 번, 중요한 모임에 갈 때만 아껴 뿌리는 고가의 향수였다. 화장대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것인데, 수아의 살결에 닿았던 옷감이 그 향을 머금고 있었다.

“……하.”

실소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동경해서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니다.

수아는 내 부재를 틈타 내 옷을 입고, 내 향수를 뿌리고, 거울 속의 ‘강유진’이 되어 가상의 연극을 즐긴 것이다.

화장대로 걸어갔다.

수많은 화장품 중 내가 데일리로 쓰는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단면을 확인했다.

나는 립스틱을 쓸 때 항상 한쪽 방향으로만 비스듬하게 깎아 쓰기 때문에 끝이 날카롭다.

하지만 지금 립스틱의 끝부분은 둥글고 뭉툭하게 뭉개져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입술에 대고 문질렀다는 증거였다.

소름이 돋았지만, 가슴속은 오히려 차갑게 식어 내렸다.

‘계획적인 모방. 그리고 정체성 찬탈.’

그녀의 목적은 명확했다.

나를 이 집에서 지워버리고, 본인이 진짜 이 집의 안주인이 되는 것.

나는 옷걸이의 방향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립스틱 뚜껑을 닫았다.

증거는 이미 충분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수아를 사회적으로 매장할 결정적 한 방과, 내 딸 서아를 저 여자의 손귀에서 안전하게 격리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거실로 나오니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수아가 정갈하게 차려낸 아침 상이 식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어머,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어제 잠을 설쳐 보초를 서시는 것 같기에, 오늘 아침은 가볍게 소고기뭇국으로 준비했어요."

수아는 앞치마를 두른 채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 다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추악한 민낯을 알기에, 가식적인 미소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뒤틀렸다.

"고마워요, 수아 씨. 늘 신경 써줘서."

나는 일부러 초점 없는 눈빛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식탁에 앉았다.

그때, 안방에서 잠을 깬 서아가 꼼지락거리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인형을 품에 꼭 안은 채 졸린 눈을 비비는 아이의 모습.

가슴이 뭉클해져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아에게 손을 뻗었다.

"우리 서아, 잘 잤어? 엄마한테 올래?"

나는 어제 퇴근길에 샀던 새 초록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산뜻한 초록색이 아이의 기분을 맑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내 옷을 본 순간, 서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이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더니, 이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으앙! 싫어! 괴물! 괴물 초록이 싫어!"

서아는 마치 끔찍한 악마라도 본 것처럼 머리를 감싸 쥐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충격이었다.

"서아야? 왜 그래? 엄마야, 엄마……."

내가 당황해 다가가려 하자, 서아는 발버둥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극도의 공포에 질려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수아가 날쌔게 끼어들었다.

"어머, 사모님! 뒤로 물러서세요!"

수아는 서아를 품에 꽉 안으며 나를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서아야, 괜찮아. 이모 여기 있어. 착하지, 이제 무서운 거 없어."

신기하게도 수아의 품에 안기자 서아의 발작적인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이는 수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끅끅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머릿속에서 차가운 경고음이 울렸다.

‘말도 안 돼.’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 품에서만 자려던 아이였다.

단순히 낯을 가리거나 심리 조작만으로 세 살짜리 아이가 친엄마를 보고 ‘괴물’이라며 경기를 일으킬 수는 없다. 이건 명백한 조건반사식 훈련의 결과였다.

내 시선이 수아가 안고 있는 서아의 토끼 인형으로 향했다.

문득, 어제 수아의 방에서 나던 기묘한 냄새가 떠올랐다.

화학 약품 냄새와 매캐한 연기 냄새.

그리고 지금 서아가 공포에 질려 외친 단어.

‘괴물 초록이.’

뇌리를 스치는 가설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수아는 내가 자리를 비우거나 잠든 사이, 초록색 천이나 가면을 쓰고 서아를 어두운 방에 가두거나 물리적인 위해를 가했을 것이다.

아이에게 '초록색'과 '공포'를 연합시키고, 그 초록색을 입은 존재가 '엄마'라는 암시를 지속적으로 주입한 것이다.

"사모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수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 속에 감출 수 없는 희열이 넘실거렸다.

"서아가 요즘 예민하다고 했잖아요. 특히 초록색만 보면 자지러지는데, 왜 하필 오늘 그런 옷을 입으셨어요? 사모님의 무신경한 행동이 서아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어요."

가스라이팅.

아이를 학대해 트라우마를 심어놓고, 그 원인을 엄마의 무신경함과 정서 불안으로 돌리는 악마 같은 수법.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당장 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멱살을 잡고 울부짖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소리를 지르고 분노하면, 수아의 시나리오대로 '정신이 이상해서 아이를 겁주는 무서운 엄마'가 완성될 뿐이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다리에 힘이 풀린 척 주저앉았다. 눈물이 고인 눈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내가 미쳤나 봐요. 서아가 초록색을 싫어하는 줄도 모르고…… 미안해, 서아야. 엄마가 미안해……."

수아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자신이 완벽하게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는 우월감에 도취된 미소였다.

"괜찮아요, 사모님. 서아는 제가 당분간 전담해서 케어할게요. 사모님은 방에 들어가서 좀 쉬세요."

나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서아를 달래는 수아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닫는 순간, 내 얼굴에서 눈물과 슬픔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극도의 냉소와 살기가 서린 눈빛이 거울 속에 비쳤다.

‘내 딸의 마음에 상처를 내?’

용서할 수 없다.

단순히 해고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저 여자의 인생 자체를 갈기갈기 찢어 발겨주마.

오후 2시.

도현은 출근했고, 수아는 서아를 유모차에 태우고 단지 내 놀이터로 나갔다.

빈 집에 홀로 남은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딩동.

고요한 집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인터폰을 확인하니 백화점 쇼핑백을 든 퀵 서비스 기사였다.

나는 문을 열어 퀵을 받았다. 채원이 보낸 비밀 퀵이었다.

쇼핑백 안에는 고급 화장품 세트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그 케이스를 열자, 이중 바닥 아래에 정교하게 포장된 초소형 무선 카메라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전만 한 크기의 최첨단 카메라. 보조배터리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거실과 주방, 그리고 수아의 방을 감시하기에 완벽한 도구였다.

폰이 진동했다. 채원이 보낸 문자였다.

[카메라 보냈어. 앱 연동 방법은 설명서 참고해. 그리고 유진아…….]

이어지는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크게 떠졌다.

[흥신소 라인 통해서 한수아라는 이름으로 조회해 봤는데, 주민등록등본상의 진짜 한수아는 지금 지방의 한 요양원에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어. 2년 전에 의문의 추락 사고를 당했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즉, 지금 네 집에 있는 그 여자는 '한수아'가 아니야. 다른 사람의 신분을 도용해서 살아가고 있는 신분 위조범이야. 진짜 정체가 뭔지 더 깊게 파헤치고 있으니까, 절대 내색하지 마.]

가짜 신분. 신분 도용범.

머릿속의 퍼즐 조각들이 빠르게 맞춰지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어제 수아의 방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그 기사.

'첫 번째 성공. 다음은 강유진.'

그렇다면 그 기사 속에서 자살을 기도했다는 아내의 집에서도, 이 여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기괴하고 치밀한 기생충 같은 존재.

나는 초소형 카메라들을 손에 꽉 쥐었다.

"내 집에 들어온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가짜 한수아."

그때,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아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카메라들을 재빨리 서랍 깊숙이 숨기고, 거실로 나갔다.

"다녀왔습니다, 사모님~."

수아가 서아를 데리고 들어오며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신고 있는 구두를 보는 순간, 내 눈이 다시 한번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그 구두는, 내가 얼마 전 도현에게 선물 받아 현관 신발장 깊은 곳에 보관해 두었던 한정판 명품 로퍼였다.

수아는 이제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보란 듯이 내 구두를 신고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고 있었다.

"사모님, 이 구두 참 편하네요. 꼭 제 발에 맞춘 것처럼요."

도발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오만한 도발.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잘 어울려요, 수아 씨."

너의 그 오만이, 곧 너를 파멸로 이끌 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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