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앞 카페 테라스의 파라솔 아래서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든 서아는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해맑게 웃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맑은 방울처럼 울려 퍼질수록, 내 심장 한구석을 짓누르던 묵은 때가 완벽하게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채원아, 서아랑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나는 법률 대리인 사무실 들렀다 들어갈게."
내가 가방을 가볍게 고쳐 메며 말하자, 채원이 선글라스를 위로 올리며 피식 웃었다.
"오, 드디어 최종 서류 마무리 단계냐? 대형 로펌 변호사 통해서 송달된 거 보면 그 인간 이미 제정신 아닐 걸."
"빌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야. 이미 법적으로 끝난 판국에 마지막 남은 민사상 절차나 확실하게 매듭지어 두려고."
"알았어. 서아는 걱정 말고 다녀와. 집에서 맛있는 거 먹이면서 기다릴 테니까."
채원이 서아의 작은 손을 잡고 먼저 자리를 떴다. 아이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은 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예약된 법무법인 사무실로 향했다.
이미 지난 재판 과정과 공판 전 절차를 통해 박도현은 친권과 양육권, 그리고 재산 분할 포기 각서에 완벽하게 서명을 마친 상태였다. 법적으로 그는 우리 모녀의 삶에서 완전히 지워진 타인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오늘 변호사 사무실을 찾은 것은, 그가 저지른 업무상 배임 및 회사 기밀 유출 공모에 따른 사후 민사상 구상권 청구 및 손해배상 확정 절차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란이 서재 금고 뒤편 은닉장에 숨겨놓았던 외장 하드와 추가 백업본은, 채원이 철저한 포렌식 과정을 거쳐 확보한 원본 데이터였다. 이 디지털 증거들은 변호사 사무실을 통해 수사기관과 재판부에 정식으로 제출되었고, 그 결과 이미란은 징역 7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그 공범으로 얽힌 박도현 역시 회사에서 이미 징계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은 물론, 민형사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다.
법무법인 회의실에 들어서자, 담당 변호사가 서류 뭉치를 건네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강유진 씨, 오셨습니까. 피고측 변호인 측과 합의된 최종 민사상 책임 포기 및 구상권 관련 확약서입니다. 도현 씨 측에서 이미 모든 법적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이 서류에 최종 자필 서명만 받아두시면 더 이상의 법적 공방 없이 완벽하게 종결됩니다."
"알겠습니다. 직접 처리하죠."
나는 서류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이미 모든 상황은 내 손바닥 안에서 통제되고 있었다. 도현은 대형 로펌의 형사 전문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제 살 길을 찾으려고 애썼겠지만, 만나는 변호사마다 손을 내저으며 똑같은 경고를 날렸을 터였다. 채원이 복구해 낸 사내 기밀 백업본과 외장 하드의 내용물은 1심 실형 선고와 기업 상대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를 방어하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결정타였으니까.
잠시 뒤, 회의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변호사 사무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박도현의 모습은 예전의 그 말끔했던 대기업 팀장의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파르르 떨고 있는 꼴은 구치소 수감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도현은 나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유…… 유진아."
도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회사에서 이미 징계 해고 통보를 받고, 이미란의 가스라이팅에 가담해 회사 기밀 유출 및 금전적 이득을 취한 정황까지 드러나 검찰 조사를 거친 남자의 초상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앉아, 박도현 씨. 다리 풀리겠다."
내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편안히 기대었다. 도현은 침을 꼴깍 삼키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의 눈 밑은 퀭하게 썩어 있었고, 구깃구깃해진 양복 셔츠는 며칠 동안 빨래도 하지 않은 것처럼 꼬질꼬질했다.
"유진아…… 내가 변호사 만나고 오는 길인데, 다들 그러더라고. 검찰에 넘어간 그 외장 하드 자료랑 계좌 내역 때문에 나는 재판 가기도 전에 끝났다고…… 항소해 봤자 증거가 너무 완벽해서 형량만 늘어난대…… 내가 그 미친년에 홀려서 눈이 멀었던 거야. 제발, 나 좀 살려줘……."
도현은 다가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바들바들 떨며 엉엉 울먹였다. 이미 친권도, 양육권도, 재산 분할도 모두 포기하고 법적 각서에 도장을 찍었음에도, 형사적 처벌에 이어 거대 기업의 민사상 구상권 청구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 서자 그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살려달라고?"
나는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도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 지금 상황 파악은 제대로 한 모양이네. 변호사가 그러던가요? 항소해도 뒤집을 수 없는 완벽한 증거라고요."
"응, 그래…… 채원이가 복구해 낸 그 외장 하드 내용이 너무 치명적이래. 검찰 조서에 박힌 내 공모 혐의가 너무 확실해서 판사가 보는 순간 1심에서 바로 법정 구속이라면서…… 나 진짜 감옥 가게 생겼어, 유진아. 네가 조금만 선처해 주면 안 될까? 내가 가진 건 이제 진짜 아무것도 없어……."
도현이 의자에서 주저앉다시피 하며 내 바지자락이라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한 치의 자비도 없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서아 아빠? 그 입에 서아 올릴 자격이 당신한테 있어? 당신이 이미란 그 년이랑 붙어먹으면서 나를 정신병자로 몰아갈 때, 내 심정이 어땠을 것 같아? 서아가 내 손길을 거부하고 그 괴물 같은 년한테 안길 때, 나는 매일 밤 지옥에서 살았어. 당신은 공범이야, 도현 씨. 이미란이 내 가정을 파탄 내고 내 자리를 훔치려 들 때 옆에서 판 깔아 준 일등 공신이라고."
"……."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건, 당신한테 동정을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야. 이미 법적으로 끝난 재산 포기와 친권 포기 외에, 당신이 저지른 배임 행위에 대한 민사적 책임을 최종적으로 확정 짓기 위해서지."
도현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눈을 굴렸지만, 대형 로펌 변호사마저 실형을 면하기 어렵다고 통보한 현실과, 지금 내 눈앞에 놓인 냉혹한 사실 앞에서 더 이상 버틸 용기가 없었다.
담당 변호사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서류를 도현 앞으로 밀어 밀었다.
"이게 뭔 줄 알아? 이미란이 서재 금고 뒤편 은닉장에 숨겨놓았던 외장 하드, 그리고 포렌식을 통해 완벽하게 복원된 추가 백업본에 기반한 민사상 손해배상 및 구상권 청구 포기 및 확정 서약서야. 형사 처벌은 법원이 알아서 하겠지만, 당신이 회사와 사회에 끼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민사적 책임은 이 서류로 최종 마감된다."
도현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훑어보더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금고 뒤편에 있었단 말이야……? 그 년이 분명히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그 년이 숨긴 걸 내 친구 채원이 디지털 포렌식으로 완벽하게 복구해 낸 덕분에 당연히 다 까발려졌지. 자, 착각하지 마. 내가 오늘 당신을 불러낸 건, 이미 법적으로 끝난 재산 포기와 친권 포기 외에 이 민사상 구상권에 대한 최종 확약을 받아두기 위해서야."
도현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호기심이나 희망이 아니라, 가죽을 벗기는 듯한 공포였다.
"확인하다니…… 뭘?"
"착각하지 마. 이미란은 징역 7년 선고받고 구치소에서 썩고 있지만, 당신은 아직 재판이 남았잖아? 형사 처벌은 법원이 알아서 하겠지만, 당신이 회사와 사회에 끼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민사적 책임은 별개야. 이거 서명해. 안 그러면 이 추가 백업본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소송, 내 손으로 직접 기업 측 법무팀에 완벽한 증거 목록으로 첨부해서 넘겨줄 거야. 그럼 당신이 짊어질 빚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겠지."
도현은 질린 얼굴로 내가 내민 서류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혈색이 완전히 빠져나가며 시퍼런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까지 다 떠안으라고……? 그럼 나는 출소해도 빚더미에 앉아서 평생 바닥을 기어야 하잖아……!"
"남는 거? 애초에 남의 가정을 짓밟고 도둑질해 가려던 인간에게 남을 줄 알았어? 선택해. 지금 당장 이 확약서에 도장 찍고 네 죗값을 그나마 깔끔하게 치르든지, 아니면 내 손으로 남은 인생까지 아주 밑바닥까지 박살 내주든지."
도현은 미칠 듯이 흔들리는 눈으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종이 위를 긁는 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도현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옥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심정으로 마지막 칸에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모든 서명이 끝나자마자, 담당 변호사는 도현이 쥐고 있던 서류를 단호하게 거둬들여 클리어 파일에 안전하게 철했다.
"다, 됐지……? 이제 만족해?"
도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의자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남자를 향해 마지막으로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마. 서아에게도 당신 같은 인간의 존재는 지워버릴 테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회의실을 나왔다. 법무법인 빌딩을 나서자, 가을의 청명한 햇살이 내 얼굴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모든 쓰레기는 제자리를 찾아 처박혔고, 내 자리는 완벽하게 제 주인에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