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 정문을 빠져나온 내 차가 시내로 진입할 무렵, 스마트폰 화면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윤채원.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갔다.
[방금 도현이 놈 정리 끝났어. 서류에 도장 확실하게 받아냈다. 재산 분할 포기 각서랑 친권·양육권 포기 서류 아주 깔끔하게 끝났어. 회사에서도 이미 짤렸고, 갈 데라곤 지하철역 노숙자 신세밖에 없겠더라. 소송 갈 것도 없이 완벽하게 정리됐어.]
나는 핸들 위로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미란의 구속과 함께 사기 대출 공범으로 몰려 회사에서 긴급 징계해고 통보를 받은 박도현이었다. 그 잘난 대기업 팀장 타이틀도, 쥐고 있던 명예도 하루아침에 신기루처럼 사라졌으니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경찰서 앞 골목에서 마주친 도현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란과 벌인 사기 대출 및 회사 기밀 유출 정황이 담긴 포렌식 자료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자, 도현은 사색이 되어 무너졌다. 당장 경찰에 자수하기 싫거든 서류에 도장부터 찍으라는 채원의 서늘한 압박 앞에 그는 부들부들 떨며 제 손으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제멋대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며 가스라이팅에 동조했던 대가는 냉혹하고도 확실했다.
"자업자득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속페달을 밟았다. 이제 모든 법적 절차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남은 것은 구치소 방구석에서 재판을 기다리며 덜덜 떨고 있을 이미란의 비참한 말로뿐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서아가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엄마!"
"우리 서아, 잘 있었어?"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품에 와락 안기는 서아를 꽉 껴안았다. 아이의 몸에서는 아기 냄새와 함께 햇살의 온기가 가득 묻어났다. 더 이상 초록색 딸랑이 인형을 찾으며 불안에 떨거나,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채원이 아이를 돌보는 동안 집안 곳곳을 소독하고, 이미란의 흔적이 밴 모든 물건을 불태우듯 버린 보람이 있었다.
"이모랑 블록 놀이 했어요. 엄청 높이 쌓았지롱."
"그래? 우리 딸 천재네."
서아의 맑고 동그란 눈망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오직 나를 향한 온전한 신뢰와 사랑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지옥 같았던 독박 육아의 우울과, 그를 파고들어 자리를 찬탈하려던 가짜 시터의 악몽은 이제 완전히 과거의 일이 되었다.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며 채원이 들어왔다. 채원은 손에 두툼한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유진아, 이거 확실하게 처리해 줬다. 박도현 그 호구 자식, 내 손으로 직접 서류 내밀었더니 눈물까지 찔끔 흘리던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표정이라 아주 구경거리가 따로 없었어."
채원이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툭 던지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봉투 겉면에 찍힌 '친권 및 양육권 완전 포기 각서'와 '재산 분할 포기 합의서'라는 글자가 눈에 선명했다.
"고생했어, 채원아. 직접 만나서 받아내느라 힘들었지? 덕분에 법적 리스크는 제로야."
"고생은 무슨.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이 모든 판을 짜고 역관광 태운 건 우리 강 이사님이신데."
채원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근데 이미란 그년 말이야, 공판 끝나고 선고 내려지면 형량은 확실하게 나오는 거지?"
"어."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냉정하게 답했다.
"송도 전과에 이번 신분 위조, 영유아 정서적 아동학대, 그리고 박도현 명의를 도용한 거액의 대출 사기까지 병합됐어. 국선 변호사가 아니라 전관예우 변호사를 몇 명을 붙여도 실형 7년은 확정이야. 교도소 담벼락에서 청춘 다 보내고 나오면 40대 중반이겠지."
"쌤통이다. 남의 가정에 빨대 꽂아서 인생 통째로 도둑질하려던 년의 말로치고는 아주 안성맞춤이네."
채원이 속이 시원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유진야, 너 오늘 아침에 구치소 면회 다녀오고 나서 뭔가 더 남은 거 있어? 1심 선고 재판일 잡히려면 아직 멀었잖아."
"아니, 오늘 면회 간 걸로 충분해."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철창 안에서 자기 인생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하루하루 피 말리며 체감하고 있을 테니까. 정식으로 법정에 세워 징역 7년 선고 떨어지는 날, 그 꼴을 직접 구경해 주는 게 마지막 피날레지."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이제 그 년 얼굴은 법정이나 뉴스 화면으로나 보는 걸로 하자고."
채원과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마지막 찌꺼기마저 말끔히 증발해 버리는 기분이었다.
수개월에 걸친 치열한 공판과 증거 조사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법정은 그동안 드러난 이미란의 여죄와 치밀한 범행 수법을 낱낱이 파헤쳤고, 채원이 복구해 낸 디지털 포렌식 자료들과 과거 범죄 전원은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마침내 다가온 최종 선고 기일. 법원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나는 피고인석에 선 이미란을 바라보았다. 구치소에 수감되어 지내는 동안 그녀의 콧대는 완전히 꺾여 있었다. 푸른색 수의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흙빛이었고,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눈은 퀭하게 들어가 있었다.
"피고 이미란을 징역 7년에 처한다."
판사의 엄정한 판결 선고가 법정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아니야……! 판사님, 저는 단지……!"
이미란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려 했지만, 양옆에 서 있던 교도관들에 의해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그녀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유진! 이 치사한 년! 너 가만 안 둘 거야! 감옥에서 나와서 너 가만 안 둔다고! 으아아아악!"
교도관들에게 끌려나가는 이미란의 시선이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나와 마주쳤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분노와 살기,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린 처절한 절망감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차갑고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벌레를 보듯, 혹은 길가의 돌멩이를 보듯 완벽하게 무관한 눈빛으로.
이미란은 그 시선을 견디지 못했다는 듯, 발버둥을 치다 이내 법정 문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철컥, 하고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법정 안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끝이었다.
법원을 걸어 나오는 내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법원 앞 카페 테라스에는 채원이 서아를 데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는 엄마를 보자마자 아르바이트생이 서비스로 준 마카롱을 손에 쥔 채 아르르 웃으며 달려왔다.
"엄마!"
"우리 공주, 잘 기다렸어?"
나는 서아를 번쩍 들어 안았다. 가을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더 이상 춥지 않았다. 내 품에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든 진짜 엄마인 나와, 사랑스러운 딸 서아가 있었다.
"엄마, 어디 갈 거야?"
서아가 내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글쎄, 우리 서아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 사러 갈까?"
"와! 진짜요? 초코 케이크요!"
서아가 만세를 부르며 뛰어다녔다. 나는 아이의 손을 더 꼭 잡고 눈부신 햇살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거의 우울과 두려움은 모두 지워졌다. 이제 이 집의 진짜 주인은 나였고, 우리의 내일은 완벽하게 평화로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