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이 찍힌 합의서와 각서를 수거해 가방에 넣고 일어섰던 그날로부터 정확히 세 달이 흘렀다.
지옥 같던 계절이 지나고, 세상은 푸릇푸릇한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3개월 동안 내 삶은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정서불안 증세를 보이며 나를 밀어내고 자지러지게 울던 서아는 이제 아침에 눈을 뜨면 나부터 찾으며 품에 안겼다. 이미란이 서아에게 각인시켰던 기괴한 초록색 공포의 잔재를 지워내는 데는 수많은 눈물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결국 우리는 해냈다.
더러운 오물들을 치워낸 집구석은 그 어느 때보다 아늑하고 평온했다.
"유진아, 이것 좀 봐봐. 아주 흥미진진한 소식이야."
소파 맞은편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채원이 큭큭거리며 내게 화면을 돌려보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의 캡처 화면과 대기업 S사의 내부 징계 의결서 스캔본이 열려 있었다.
"방금 대기업 라운지 베스트 글에 올라온 따끈따끈한 소식. 네 전남편 씨 회사 말이야."
"박도현?"
"응. 대기업 팀장 타이틀에 목숨 걸던 그 인간, 오늘 자로 아주 처참하게 터졌더라고."
나는 품에서 잠든 서아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침대에 눕혀두고 채원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화면에 선명하게 박힌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대기업 S사, 영업 2팀 박도현 팀장 징계해고 공고문]
"결국 오늘 최종 의결이 났네."
나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내가 직접 설계하고 채원이 완성한 덫의 마지막 톱니바퀴가 드디어 맞물려 돌아간 것에 가까웠다.
"어마어마하더라. 이미란 그 미친년이 보통 빨대인 줄 알았더니, 박도현이라는 멍청한 호구를 아주 뼈째로 발라 먹었어."
채원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지난번에 처벌불원서 써줘서 아동학대 방조죄는 겨우 구속을 면하고 불구속 기소 상태로 재판받고 있잖아? 법정에서 질질 짜면서 판사 바짓가랑이 붙잡고 있었을 텐데, 진짜 본게임은 회사 감사팀이었던 거지."
아동학대죄는 반의사불벌죄가 아니다. 내가 처벌불원서를 써주었다 한들 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양형에 참작되는 요소일 뿐.
도현은 기소되어 1심 재판을 준비하며 매일 피가 마르는 지옥을 걷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지옥은 사법부의 심판만이 아니었다.
박도현은 이미란의 교묘한 가스라이팅에 놀아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기업 범죄의 공범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대기업 팀장 자리까지 올라간 엘리트였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척했고,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박도현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알량한 '인정욕구'와 승진 누락으로 인한 '불안감'이었다.
동기들에 비해 상무 승진 심사에서 연거푸 미끄러지며 조바심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 이미란은 그 틈을 아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팀장님 정도 되는 능력을 갖춘 남자가 왜 이 회사에서 이것밖에 누리지 못하는지 이해가 안 가요. 제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모펀드가 있는데, 거기서 팀장님 같은 인재를 꼭 영입하고 싶어 해요.'
이미란이 내밀었던 화려한 위조 명함과 가짜 투자 제안서, 그리고 철저한 기밀 유지 계약서. 자신이 드디어 능력을 인정받아 억대 연봉의 외국계 펀드로 이직할 수 있다는 달콤한 착각에 빠진 순간, 박도현의 눈은 완전히 멀어 버렸다.
그는 사모펀드의 '사전 역량 검토용'이라는 이미란의 말에 속아, 자기가 관리하던 회사의 핵심 영업 비밀과 입찰 단가표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이미란이 제안한 '품위 유지비 우회 지원'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제 명의로 유령 회사를 설립하고 거래처 리베이트를 받아 챙기는 통로를 열어주기까지 했다.
철저한 척하던 엘리트가, 자존심을 긁어대며 숭배해 주는 사기꾼의 가스라이팅 한 방에 무너진 것이다.
그 대가는 실로 참혹했다.
"의결 사항 좀 봐. 징계해고, 즉 파면이야."
채원이 엔터 키를 탁 쳤다.
[의결 사항: 징계해고(파면)] [사유: 회사 자금 횡령 방조, 배임, 업무상 비밀 누설 및 거래처 리베이트 우회 수수 연루] [추가 조치: 퇴직금 전액 지급 보류 및 본사 법무팀을 통한 형사 고소 진행]
"퇴직금도 한 푼 못 받고 길바닥으로 쫓겨나는 데다가, 대기업 법무팀에서 직접 업무상 배임으로 고소장을 제출했대. 박도현 씨, 이제 진짜 빨간 줄 제대로 긋고 평생 빚더미에 앉게 생겼어."
"업계에는 소문 다 났겠네."
"소문 수준이 아니라 매장이지. 이미 대기업 단톡방이랑 블라인드에 실명까지 싹 다 털렸어. '영업2팀 박도현, 사기꾼 시터한테 홀려서 회사 기밀 유출하고 횡령하다 파면당했다'고. 동종 업계는커녕 어디 구멍가게 과장으로도 재취업은 꿈도 못 꿀걸?"
독박 육아로 피눈물을 흘리던 나를 향해 '애 하나 제대로 못 키워서 도우미 손 빌리는 무능한 아내'라며 비하하던 남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내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박도현'.
채원과 내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전화 왔네. 받아볼래?"
채원이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조용히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고 통화 연결을 했다.
"유진아…… 유진아! 제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처참하게 찢어지고 갈라져 있었다. 그 잘나고 당당하던 대기업 팀장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무슨 일이야, 박도현 씨."
나는 온기라곤 전혀 없는 목소리로 응대했다.
"제발 나 좀 살려줘…… 어? 네가 회사 감사팀에 그 자료들 넘긴 거 맞지? 제발 그거 오해라고, 네가 오해해서 제보한 거라고 회사에 한마디만 해줘! 제발!"
"오해?"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 오늘 해고당했단 말이야! 파면이라고! 퇴직금도 안 나오고, 회사에서 나 형사 고소하겠대! 검찰에서 나 구속영장 청구할 거래, 유진아! 나 이대로 가면 정말 감옥 가! 구속 수사 떨어진다고!"
"그건 네 사정이지. 네가 회사 기밀 넘겨주고 거래처 등쳐먹는 데 동조한 게 내 탓이야?"
"그건…… 그건 이미란 그 년이 시켜서 한 거야! 나도 피해자라고! 그 년이 자기가 무슨 유명 자산가 딸인데 급하게 명의만 빌려달라고 해서…… 그래서 난 서아 교육비나 우리 집안에 보탬이 될까 싶어 잠깐 도와준 것뿐이란 말이야!"
변명마저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서른넷 처먹은 대기업 팀장이라는 놈이, 이십 대 사기꾼 기지배 꼬임에 속아서 회사 돈을 수천만 원씩 빼돌리게 방조했다?"
나는 차갑게 냉소를 날렸다.
"경찰서 가서 판사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봐. 참 잘도 믿어주겠다. 6개월 동안 너 감사실 조사받으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유진아!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줘. 서아 생각해서라도……! 내가 감옥 가면 서아는 전과자 아빠를 두게 되는 거잖아! 응? 친권도 양육권도 다 포기했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잖아!"
"박도현 씨."
나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차갑게 읊조렸다.
"착각하지 마. 내가 써준 처벌불원서는 '아동학대 방조'와 '가정폭력'에 대한 내 개인적인 합의서야. 네가 회사에서 저지른 업무상 배임과 횡령은 내 소관이 아니지."
"뭐……?"
"그리고 서아 걱정은 고맙지만 사양할게. 이미 친권이랑 양육권 전부 내 쪽으로 넘어왔고, 성본 변경 신청도 법원에서 최종 승인되었으니까. 서아 인생에서 네 이름 석 자는 완전히 지워졌어. 넌 그냥 생물학적 기증자일 뿐이야."
"유진아! 제발, 제발……! 나 지금 갈 곳도 없어. 본가 부모님 집도 난리 났단 말이야……! 나 지금 친구 원룸 구석에 처박혀서 영장실질심사 대기하고 있어. 나 좀 살려줘…… 어떡해, 나 이대로 구속되면 끝장이야!"
수화기 건너편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도현의 비참한 흐느낌이 이어졌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도현의 부모…… 그러니까 내 전 시댁 역시 완벽하게 풍비박산이 났다. 하나뿐인 자랑스러운 대기업 팀장 아들이 사기꾼 시터와 뒹굴며 회사 돈을 유용해 파면당하고 구속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시어머니는 뒷목을 잡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평생을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시아버지는 이웃들 눈이 무서워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그 잘나신 아들 뒤에 숨어 나를 며느리 취급도 안 하고 '애 하나 똑바로 건사 못하는 예민한 년'으로 몰아가던 대가치고는 꽤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끊을게. 질질 짜는 소리 듣기 거북하니까."
"안 돼! 유진아! 내가 빌게! 내가 네 집 앞까지 갈게! 제발 문 한 번만 열어줘, 응?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제발……!"
"박도현."
나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 내가 독박 육아로 잠도 못 자고 뼈가 삭아내릴 때, 당신이 나한테 뭐라고 했었지?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비웃었잖아."
"……유진아."
"그대로 돌려줄게. 정신 차리고 이겨내 봐. 직장 잃고 빨간 줄 그여서 길바닥 나앉는 거, 남들도 다 겪는 일이니까. 네 의지가 약해서 무너지지 말고, 감옥 들어가서 한번 잘 버텨봐."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잔인한 건 당신들이 먼저 가르쳐준 거야. 내 집에서, 내 소중한 일상 속에서."
나는 미련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방 안에 고요가 찾아왔다. 채원은 무릎을 탁 치며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맑게 웃었다.
"완벽하다, 강유진. 이제 박도현은 완전히 사회적으로 숨통이 끊어졌네."
"당연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쳐 입었다. 단정한 단발머리를 매만지는 내 눈빛에 서늘한 광채가 돌았다.
"어디 가려고? 서아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다녀와."
채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응. 마지막 쓰레기를 청소하러 가야지."
"마지막 쓰레기?"
"이미란."
나는 입꼬리를 아주 느리게 끌어 올렸다.
"그 괴물이 구치소에서 나를 아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고. 날 망가뜨리고 내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직접 보여줘야지."
가방을 움켜쥔 내 손끝에 서늘한 긴장감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짜릿한 흥분이 차올랐다.
내 자리를 노렸던 완벽한 시터. 이제는 완벽하게 추락한 그 괴물을 마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