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현관문이 닫히며 이미란의 고함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거실에는 기괴한 침묵만이 남았다. 시부모님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소파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도현은 바들바들 떨며 나를 바라보았다.
“유…… 유진아.”
도현이 침을 꼴깍 삼키며 다가왔다. 구구절절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열린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바닥에 뒹구는 이미란의 명품 캐시미어 코트가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는지를 증명하는 흉물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도현의 말을 끊었다.
“입 다물어.”
냉혹하게 떨어진 한마디에 도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직 이 거대한 폭풍 속에서 살아남을 궁리만 하는 눈치였다.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유, 유진야……! 아니, 우리 아들이 뭘 몰라서 그랬지! 그, 그 년이 워낙 여우같이 속여서……!”
시어머니가 바닥을 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이 집의 진짜 안주인이라도 된 마냥 나를 쥐어잡으려 들던 기세는 어디 가고, 이제 와서는 남 탓을 하며 비참한 구걸을 시전하는 꼴이었다.
“어머니, 목소리 낮추세요.”
내가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로펌 조사원으로 뛰며 수많은 사기꾼과 위선자들을 마주해 온 내게, 저런 추태는 눈요깃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 이 거실에 남아 있는 사람 중에 누구도 저를 탓할 자격 없습니다. 내 남편이라는 사람은 제 정신을 의심하며 저를 아동 학대범으로 몰아세우는 데 앞장섰고, 두 분은 그 장단에 맞춰 제 자리를 뺏으려고 혈안이 되셨으니까요.”
“아, 아니야……! 우린 단지……!”
“경찰서 가기 싫으시면 조용히 계세요.”
나지막하게 읊조린 목소리 하나에 시어버지가 헛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도현은 벌벌 떨며 내 눈치만 살폈지만, 이미 우리 사이의 신뢰라는 끈은 완전히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그때, 방 안에서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아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서아는 내가 데리고 들어갈 테니까, 세 사람 다 자리에 앉아 있어요.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현관 밖 복도랑 비상계단마다 채원이 심어둔 원격 감시 센서랑 사설 경호 인력이 대기 중이니까요.”
내 서늘한 경고에 도현과 시부모님은 엉덩이를 떼지도 못한 채 굳어버렸다. 나는 차갑게 돌아섰다.
서아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낯선 소란에 놀라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작은 인형 같은 딸이 보였다.
“엄마……”
서아가 울먹이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품에 안았다. 그동안 이미란이 이 작은 아이를 어떻게 심리적으로 옥죄고 통제했는지 생각하면 치가 떨렸지만, 다행히 아이는 내 체온을 느끼자 안정을 되찾았다.
“엄마 여기 있어. 아무 걱정 마, 서야.”
아이를 안고 거실로 다시 나오자, 채원이 태블릿을 챙기며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들과의 임의제출 조율 및 디지털 증거 백업은 이미 완벽하게 끝마친 상태였다.
“유진 언니, 폴리스 라인 근처 증거물 임의제출 확인서는 담당 경위한테 다 받아뒀어. 포렌식 원본 데이터는 내 서버로 이중 백업 끝났고. 저 여자가 저지른 추가 여죄 수사 공조 요청도 대전 경찰서 쪽으로 바로 넘겨놨으니까 걱정 마.”
“고마워, 채원아. 네 덕분에 판이 아주 깔끔하게 끝났어.”
“말도 마. 이런 쓰레기 처리하는 건 체질에 맞아.”
채원이 픽 웃으며 현관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떠난 뒤, 거실에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세 사람만 남았다.
도현은 채원이 남기고 간 디지털 포렌식 복구 자료와, 그 과정에서 출력되어 바닥에 어지럽게 흩뿌려진 방대한 서류 뭉치들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했다. 이미란의 가짜 보고서 초안과, 도현이 아내를 몰아세우며 수아의 말에 동조했던 통화 녹취록 스크립트 파편들이 거실 바닥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박도현.”
내 부름에 도현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혼서류는 내일 로펌 변호사 통해서 보내줄 거야. 재산 분할? 양육권? 꿈도 꾸지 마. 네가 저 사기꾼이랑 짜고 나를 정신병자로 몰았던 녹취록이랑 증거들, 법원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뭐? 재산 분할이랑 양육권을 포기하라고? 유진아, 진정해! 나도 피해자야! 나도 저 여자한테 완벽하게 속았다고!”
도현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내가 차가운 눈으로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가리키자, 도현의 얼굴에서 색이 싹 가셨다.
“속았다고? 과연 그럴까. 수아가 당신한테 내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고 흘릴 때, 당신은 내 말을 들으려고 노력한 적 있어? 오히려 회사 업무 바쁘다는 핑계로 내 존재를 귀찮아하며 저 여자한테 가정의 모든 실권을 넘겨건 당신이야. 거기에 서류상 위조 공범으로 엮이기 싫으면 조용히 법적 절차 따라.”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부부인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변호사를 세워? 네가 뭔데 내 재산이랑 애를……!”
도현이 바닥을 치며 억울하다는 듯 악을 썼다. 옆에서 시어머니도 거들며 내게 달려들려 했다.
“그래, 이 야속한 년아! 네 남편이 그나마 제정신 차리게 도닥여주지는 못할망정, 집구석을 이단으로 만들어? 당장 우리 아들한테서 떨어져!”
나는 그 역겨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거실 가득, 불과 사흘 전에 도현이 수아와 짜고 나를 몰아붙이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유진 씨,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수아 씨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라? 이대로 가면 당신 병원 보내는 수밖에 없어.]
— [맞아요, 사모님. 제가 서아를 더 잘 키울 수 있어요. 그러니 조금 쉬세요.]
도현의 목소리와 이미란의 목소리가 엉겨 붙은 녹음파일이 거실을 채우자마자, 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시뻘개졌다가 하얗게 질리기를 반복하던 도현은,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감한 듯 주저앉았다.
“이 녹취 하나면 법원에서 당신은 아동 학대 방조 및 유기 교사범으로 낙인찍힐 거야. 당장 회사 감사팀에 이 자료가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지. 대기업 팀장 자리가 유지될 것 같아? 게다가 이미란이 위조 신분으로 이 집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당신 명의의 추천서와 동의가 사본으로 첨부된 거 몰라? 공문서위조 방조죄까지 엮이면 당신 인생은 그날로 끝이야.”
내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도현의 눈동자가 극심한 공포로 흔들렸다. 그가 법정 소송으로 얻을 수 있는 실익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소송이 진행되는 순간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커리어, 남은 재산까지 모두 공중으로 사라질 판이었다.
“특히 지금 당장 당신 회사 인사팀장 메일로 이 포렌식 종합 보고서와 이미란의 신원조회서가 임시 예약 발송 상태야.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5분 뒤에 당신 회사의 모든 임원이 이 사실을 알게 되겠지. 재산 분할 한 푼 없이 깔끔하게 합의서에 도장 찍을래, 아니면 소송으로 회사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당할래? 선택해.”
도현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의 폰 화면을 스치듯 보니, 회사 메신저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팀 내 긴급 현안 보고와 감사의 눈초리가 이미 그의 목을 죄어오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모양이었다.
“미안해…… 유진아, 내가 미쳤었어. 제발, 메일은 보류해 줘……!”
“도장 찍어.”
나는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둔 법률 대리인 공인 서식의 재산포기각서 및 양육권 포기 합의서를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탁 던졌다. 도현은 더 이상 반박할 명분을 찾지 못한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펜을 집어들었다. 시부모가 뭐라고 울부짖든 간에, 자신의 목줄이 내 손에 쥐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도현은 무너듯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어 내려갔다.
며칠 뒤, 남부지검 구치감 면회실.
아크릴판 너머의 면회실 안쪽은 차가운 금속과 콘크리트의 냄새로 가득했다. 수감복을 입은 이미란이 교도관의 손에 이끌려 들어와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남의 인생을 훔치려던 그 오만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찾아볼 수 없었다.
유치장의 싸늘한 공기와 사방이 막힌 벽은 그녀를 숨막히게 조여오고 있었다. 자신이 짜놓았던 거대한 망상의 성이 무너졌다는 현실이 뼛속까지 파고드는지, 이미란은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파르르 떨었다.
나는 아크릴판 너머로 수화기를 들어 올리며, 지극히 차분하고도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거기 지낼 만해, 이미란 씨?”
이미란의 핏발 선 눈이 번뜩이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입술이 잘게 떨리다 이내 악에 찬 소리로 터져 나왔다.
“강유진……! 이 악랄한 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진심이었어! 서아도 내가 더 잘 키울 수 있었다고!”
“진심? 남의 가정에 기생해서 정체성을 도둑질하고, 아이를 정서적으로 학대하며 엄마의 자리를 찬탈하려던 게 진심이야?”
“네가 비어있었잖아! 네가 독박 육아에 찌들어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그 자리를 채워준 건 나였어! 네 남편도, 네 딸도 결국 나를 더 원했다고!”
이미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구치소의 차가운 벽에 부딪힌 그녀의 악 쓰는 소리는 초라한 메아리가 되어 흩어질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여워할 가치조차 없는, 바닥까지 추한 사기꾼의 말로였다.
“착각하지 마, 이미란. 네가 훔치려던 건 내 삶이 아니라, 그냥 내가 버려둔 잠시의 틈새였을 뿐이야. 그리고 그 틈새에 발을 디디는 순간, 너는 내 덫에 걸린 사냥감에 불과했어.”
“……뭐?”
“대전지법 판결문부터 네가 거쳐 온 전과 기록들. 전국의 맘카페와 사법기관이 네 진짜 이름을 부르게 될 거야. 감옥 안에서 평생 네 진짜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면서 썩어보도록 해. 남의 자리를 탐한 대가가 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테니까.”
내 목소리는 단호했고,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그녀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현실이 얼마나 거대하고 끔찍한지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 아크릴판을 손톱으로 긁으며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안 돼! 꺼내줘! 나 여기서 못 나가……!”
교도관들이 사색이 되어 발악하는 이미란의 팔을 붙잡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미란의 비명 소리가 철문 너머로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모든 탁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완벽한 고요와 평온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