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이 닫힌 뒤, 거실은 묘한 적막에 휩싸였다. 도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감싸고 있었고, 이미란은 그 옆에 서서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그러쥐고 있었다.
“……유진이가 진짜 갔어.”
도현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란은 그런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피식 웃었다.
“울지 마세요, 도현 씨. 이제 다 잘될 거예요. 그 여자는 애초에 엄마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경찰이니 변호사니 하던 말이……”
“걱정 마세요. 다 자격지심에 부리는 주정일 뿐이니까. 증거라니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미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그 이면에는 소름 끼칠 정도의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도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안방 침대 옆, 내가 일부러 눈에 띄게 올려둔 금고 열쇠와 통장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란의 입꼬리가 귀까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정말 바보 같네…… 이렇게 쉽게 내 손에 들어올 줄이야.”
그녀는 열쇠를 집어 들고 금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제법 두툼한 현금 봉투와 우리 부부의 인감도장, 그리고 서류들이 가득했다. 이미란은 그것들을 꺼내 자신의 가방에 쑤셔 넣으며 희열에 찬 숨을 몰아쉬었다.
내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그 모든 광경이 고스란히 재생되고 있었다. 차 안의 대시보드 거치대에 고정한 화면 너머로, 이미란이 내 옷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맘에 드는 걸 골라볼까.’
이미란은 내 이름이 새겨진 명품 캐시미어 코트를 꺼내 몸에 대보았다.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는 그녀의 표정은 완벽한 여주인의 그것이었다. 마치 강유진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그 빈자리에 자신이 완벽하게 스며들었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집 안 곳곳에 설치된 초소형 와이파이 캠과 모빌의 도청기는 그녀의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수집했다. 이미란은 도현을 거실로 불러내 와인잔을 부딪치며 속삭였다.
“어때요, 도현 씨? 이 옷 잘 어울려요? 이제 이 집 안에서 거슬리는 사람은 없어요. 오직 나와 서아, 그리고 당신뿐이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오는 이미란의 목소리는 달콤하면서도 기괴했다. 도현은 그 유혹적인 목소리에 홀린 듯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진이 떠난 직후, 이미란은 유진의 스마트폰 번호로 걸려 오는 전화나 메시지를 몰래 차단하고, 도현에게는 "언니가 당분간 연락 하지 말래요,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네요"라며 교묘하게 가짜 부재중 메시지를 꾸며 전달해 둔 상태였다. 도현은 이미란의 그 거짓말에 완전히 세뇌되어 아내의 안부조차 직접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수아 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 유진이는 너무 예민했어.”
결국 남자는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내가 예상했던 시나리오 그대로, 도현은 죄책감과 현실도피 속에서 이미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차가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미란이 금고를 뒤지고 내 옷을 꺼내 입는 동안, 내 손가락은 이미 서아의 방에 설치된 캠의 녹화 버튼을 향해 있었다. 아이가 불안에 떨며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나는 즉시 채원에게 연락해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의 비상 출동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내 딸을 저 괴물의 손에 단 1분이라도 더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증거 수집은 이미 충분했다. 저 년이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착각하는 이 찰나의 순간이, 곧 그녀를 끌어내릴 벼랑 끝이 될 터였다.
나는 채원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채원: 유진야, 흥신소 동생들 통해서 이미란 이 X 과거 전과 기록 추가로 확보했어. 대구랑 부산에서 벌인 사기랑 가정 파탄 내역 완벽해. 경찰이랑 아동보호기관 동행해서 바로 움직일 준비 끝났어.]
[유진: 수고했어, 채원야. 지금 당장 움직이자. 그 여자가 완전히 여주인 행세에 취해 방심하는 그 순간에 터뜨릴 거야.]
답장을 보내고 차 시동을 걸었다. 나는 친정으로 가는 대신 채원이 마련해 준 안전 가옥에서 이미란의 실시간 행각을 모니터링하며, 서아를 안전하게 구출할 타이밍을 조율해 왔다.
그리고 주말이 저물어가는 일요일 밤 11시. 이미란은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도현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듯 과일을 깎아 바치고 있었다.
“수아 씨, 정말 대단해. 당신 덕분에 집이 안정을 찾았어.”
“그럼요.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거예요. 자, 이 와인 한 잔 받으세요.”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거실 마이크를 타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미란의 얼굴에는 만면의 미소가 가득했다. 자신이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의 오만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으로 전환된 통화 음성이 거실 전체에 퍼졌다.
—네, 서초경찰서입니다. —아, 저…… 신도시 푸르지오 아파트 101동 1204호인데요. 여기 아동 학대와 유기가 의심되는 정황이 있어서요. 아이 엄마가 며칠째 집을 비우고 연락이 안 되는데, 남겨진 아이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당장 출동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이미란의 목소리는 훌륭한 연기 그 자체였다. 걱정 가득한 목소리, 떨리는 손끝, 그리고 완벽한 '정의로운 베이비시터'의 코스프레.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미란은 며칠 전부터 유진이 집을 비우고 가출한 것처럼 보이도록 유진의 짐을 일부 정리해 현관에 두는 등 치밀하게 증거를 조작해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도현의 몰래폰을 이용해 시부모님에게도 직접 연락을 넣어 "며느리 유진이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와서 애를 두고 집을 나갔는데 연락이 안 된다"며 불안감을 한껏 조성해 둔 참이었다.
—네, 즉시 출동하겠습니다. 주소 다시 확인해 주세요.
전화가 끊어지자, 이미란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도현 씨, 들었죠? 이제 경찰이 오면 그 여자는 끝이에요. 아동 학대범으로 낙인찍혀서 다시는 이 집 근처에도 못 올 겁니다.”
“하지만…… 유진이가 정말 가만히 있을까?”
“증거가 없잖아요. 금고도, 통장도, 아이를 방치한 기록도 다 이 집에 있는데 그 여자가 뭘 어쩔 건데요?”
이미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눈에 비친 모습은 더 이상 베이비시터 한수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진짜 '강유진'이 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잠시 후, 아파트 현관문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딩동—
도현이 당황하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문밖에는 출동한 경찰관 두 명과 함께, 이미란이 미리 넣어둔 이간질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급히 달려온 시부모님까지 정확히 서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이 밤에 여긴 어쩐 일……?”
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란이 잽싸게 현관 앞으로 걸어 나와 눈물썽인 얼굴로 시부모님의 손을 잡았다.
“어머님! 아버님! 오셨어요? 유진 언니가…… 유진 언니가 결국 아이를 두고 도망쳤어요! 제가 아무리 말려도 말을 안 듣더니, 아이를 방치하고 집을 나갔다고요!”
시부모님은 사색이 된 얼굴로 거실 안을 둘러보았다. 서아의 방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시어머니가 주저앉을 듯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우리 서아가 이게 무슨 일이람! 그 미친 년이 진짜 눈에 뵈는 게 없었구나!”
시아버지 역시 얼굴이 시뻘개져서 씩씩거렸다.
“당장 그 년 불러내! 어디 가 있어? 경찰에 신고해서 당장 끌고 오라고 해!”
경찰관 한 명이 노트에 기록하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 방치 및 학대 혐의로 신고 접수되었습니다. 보호자분 연락처가 어떻게 되십니까? 당장 출석 요구를……”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현관 쪽에서 차갑고 정제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현관문 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며칠 동안 집을 나갔다던 나, 강유진이 단정한 단발머리에 세련된 코트 차림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