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든 제천에서 찾은 진심
오후 두 시의 배론성지는 붉고 노란 단풍으로 가득했다. 머리 위로는 붉은 단풍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발밑의 산책길은 노란 은행잎으로 덮여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김민준에게는 그저 숨이 막히는 공간일 뿐이었다. 민준은 언제나처럼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터벅터벅 걸었다. 운동화 앞코는 이미 닳을 대로 닳아 하얗게 헤져 있었다.
민준의 손은 등딱지처럼 메어 멘 가방 속을 향해 있었다. 주머니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자, 단단하고 둥근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가방 속 깊숙이 몰래 챙겨온 야구공이었다. 그걸 살짝 굴리며 꼬물거리는 것만이 지금 민준이 유일하게 안정을 찾는 방법이었다.
"민준아, 여기 좀 봐라. 단풍 참 예쁘지."
김상호가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잡으며 돌아섰다. 눈가에 잡힌 옅은 주름 사이로 아들을 향한 미소가 번졌다. 상호는 늘 무거운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니던 손으로 민준의 어깨를 툭 쳤다.
"아빠는 우리 민준이가 이번 가을을 보면서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마음을 좀 다잡았으면 좋겠어. 지난번에 밀크티 학원 테스트 본 거 기억나지? 기초가 탄탄해야 고등학교 가서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민준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붉은 단풍잎이 비치는 작은 연못을 지나 아치형 다리를 건너던 참이었다. 여행을 와서까지 학원 얘기와 성적 타령을 꺼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부모님의 계획적인 여행에 억지로 끌려 나와 혼자만의 시간은커녕, 어디든 붙어 다니며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이 지긋지긋했다.
민준은 가방 속 야구공을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붉은 실밥의 감촉이 아리게 파고들었다.
"학원 안 가면 정말 큰일이라도 나요?"
민준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상호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다 너 생각해서……."
"생각은 무슨요!"
민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숲속의 맑은 공기가 한순간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얼어붙었다.
"아빠는 내가 무슨 색을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는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잖아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생각도 안 하면서, 잘되라고 포장만 하면 다예요?"
상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상호는 멍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고, 민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피했다. 서늘한 가을바람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팽팽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서먹함은 극에 달했고, 가족 여행을 향한 민준의 반감은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만큼 부풀어 올랐다.
배론성지의 숲길은 붉은 단풍잎으로 덮여 있었다. 팽팽한 침묵을 깬 것은 민준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아빠는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잖아요."
상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늘 말없이 따르던 아이였다.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잡으며 상호가 입을 열었다.
"민준아,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지. 중학교 가면 공부가 얼마나 중요…"
"그놈의 중학교 타령 좀 그만해요!"
민준이 소리를 빽 질렀다. 닳아서 하얗게 헤진 운동화 앞코가 바닥의 은행잎을 짓밟았다. 깊게 눌러쓴 야구 모자 아래로 붉어진 눈시울이 드러났다. 민준의 손이 가방 속으로 향했다. 툭툭, 가방 바닥을 더듬거리던 손가락 끝에 단단하고 둥근 감촉이 걸렸다.
민준이 가방을 홱 열어젖히더니 그 안에 숨겨두었던 야구공을 꺼내 들었다. 하얀 가죽에 붉은 실밥이 촘촘히 박힌 공이었다. 손때가 묻어 누렇게 바랜 공을 두 손으로 꽉 쥐며 민준이 울컥 눈물을 터뜨렸다.
"학원 안 가면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거예요? 난... 난 야구가 하고 싶단 말이에요. 주말마다 피아노다 영어다 끌려다니는 거, 정말 숨 막혀 죽겠다고요."
상호는 말을 잃었다. 아들의 손에 들린 야구공과 퉁퉁 부은 눈을 번갈아 보았다. 늘 무거운 서류 가방을 쥐던 상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이의 가방 속에 서류나 참고서 대신 저런 것이 들어있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민준아, 그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한 번이라도 물어본 적 있어요? 아빠한텐 늘 일하고 성적 올리는 게 전부잖아.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냐고요."
민준이 훌쩍이며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숲길을 스쳐 가며 머리 위로 붉은 잎사귀들을 흩뿌렸다.
상호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가장으로서 완벽하다고 믿었던 방식이, 정작 아들의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밀려왔다. 상호는 무거운 서류 가방을 땅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가 아들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오후의 서늘한 공기가 두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다. 상호는 품에 안았던 아이를 천천히 밀어내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물 자룩한 민준의 뺨 위로 붉은 낙엽 그림자가 어릿거렸다. 상호는 눈가에 잡힌 옅은 주름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묻고 기다릴게."
민준은 훌쩍이며 닳아 헤진 운동화 앞코만 내려다보았다. 야구 모자의 챙 아래로 그늘진 눈빛이 흔들렸다. 늘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던 서류 가방이 저만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생소한 광경에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학원 안 가면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거예요?"
민준의 작은 목소리가 가을바람에 흩어졌다. 상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세운 완벽한 기준이 부서지는 두려움이 컸을 뿐이다. 상호는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큰일 안 난다. 아빠가... 너를 잘 몰랐어."
상호의 진심 어린 고백에 민준은 품속을 뒤적였다. 땀과 먼지가 묻어 꼬질꼬질해진 손이 가방 속에서 단단하고 둥근 물체를 꺼내 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민준은 두 손으로 야구공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상호는 그 야구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늘 학원 교재와 테스트 결과지만 채워 넣으려던 가방이었다. 그 속에서 나온 하얗고 단단한 구멍 난 실밥의 공은 아들의 진짜 세계를 대변하고 있었다.
"사실은... 저 야구 선수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민준이 결심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눈동자에 서먹했던 감정의 잔여물이 씻겨 내려간 듯 맑은 빛이 돌았다. 상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오늘만큼은 다 잊고 재미있게 놀자."
상호가 아들의 손에 들린 야구공을 받아들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묵직한 감촉이 신기했다. 상호가 공을 가볍게 위로 던졌다가 잡았다.
"내일부터는, 진짜 다르게 노력해볼게요."
"내일은 내일이고, 지금은 캐치볼이다. 민준아."
상호가 씩 웃으며 공을 던질 채비를 했다. 민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청풍호 전망대의 붉은 노을을 등지고 마주 섰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로의 온기가 따스하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