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내린 카페 코너
오후의 햇살이 창가를 넘어 바닥에 길게 누웠다. 암막 커튼이 걷힌 자리로는 찬란한 가을볕이 가득 스며들었다. 지수는 카운터 너머로 원두를 갈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커피 그라인더가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묵직한 기계음 뒤로 고소한 냄새가 매장 안을 채웠다.
창밖으로는 헐벗은 산등성이가 아스라이 내다보였다. 예전의 그녀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풍경이었다. 도시에서 지수는 언제나 닫힌 공간을 선호했다. 두꺼운 블라인드를 내리고 타인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것이 유일한 방어막이자 평화라고 믿었다. 홀로 남겨진 고립감이 지독한 자유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창너머로 지나가는 이웃의 인사가 들려왔다. 지수는 고개를 들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어색했던 미소가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운 온기를 담았다.
"향 좋구먼. 문 열자마자 이 동네가 커피 냄새로 진동을 해."
덕수가 익숙한 걸음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머리에 쓰던 밀짚모자를 벗어 카운터 위에 툭 내려놓았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땀방울이 반짝였다.
"어서 오세요, 이장님."
지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핸드드립 포트를 집어 들었다. 물줄기가 가늘고 곧게 원두 위로 떨어졌다. 물과 만난 가루가 부풀어 오르며 향긋한 거품을 피워 올렸다.
"오늘은 콜롬비아로 내려드릴까요? 아니면 평소에 드시던 걸로요?"
"자네가 알아서 맛있는 걸로 주쇼. 난 뭐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여기서 마시는 건 쓸만하니까."
덕수는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무겁게 내렸다. 투박한 손으로 무릎을 툭툭 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이 덕수의 낡은 점퍼 위로 내려앉았다.
지수는 잔에 커피를 정성스럽게 채웠다. 캐러멜과 견과류의 단맛이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었다. 그녀는 잔을 접시에 받쳐 덕수 앞의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놓아두었다.
"조심하세요, 뜨거워요."
"고마워, 지수 양."
덕수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바라보며 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요즘 마을 사람들보니까 자네 얘기가 아주 자자해. 카페가 이 동네 사랑방 다 됐다고 말이야."
"제가 한 건 없어요. 그냥 문을 좀 일찍 열고 커튼을 걷었을 뿐인데요."
지수는 앞치마 매듭을 다시 단단히 고쳐 묶었다. 타인의 참견이 싫어 이 산골로 도망쳐 왔었다. 하지만 막상 부딪혀 보니 그 참견은 온기였다. 물이 끊겼을 때 악을 쓰며 다투던 이장과의 실랑이도 지금은 묘한 추억이 되었다. 덕수가 회관에서 밸브를 꼼꼼히 점검해 주기로 약속한 뒤로는 급수도 한결 안정되었다.
"처음에는 참 별난 처녀가 들어왔다 싶었지. 도시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말이야. 금방 짐 싸서 도망갈 줄 알았어."
덕수가 픽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저도 제가 이렇게 오래 버틸 줄은 몰랐어요."
지수는 덕수의 맞은편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카운터 너머가 아니라 손님과 마주 앉은 것은 처음이었다. 과거의 지수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거리였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래. 처음엔 부대껴도 섞이다 보면 정이 드는 법이지. 이 동네 겨울은 길고 추워. 혼자서는 절대 못 버텨. 서로 돕고 살아야지."
덕수의 말에는 오랫동안 이 땅을 지켜온 이의 묵직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세대 차이라는 벽 뒤에 숨어 있던 고집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맞아요. 혼자 있는 게 익숙해서 남들한테 서툴렀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지수의 솔직한 고백에 덕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자네가 마음을 열기 시작하니까 마을 분위기도 아주 밝아졌어. 겨울 축제 때 부침개 부치던 솜씨도 아주 기가 막히더만."
"칭찬이 과하시네요."
"사실을 말하는 거지. 아, 맞다. 다음 달에 마을 회관에서 김장 공동 작업이 있거든? 젊은 사람이 좀 도와줘야 맛이 나지."
덕수가 은근한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질색하며 거절했을 일이었다. 내 개인적인 사정 운운하며 선을 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수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수육은 제가 삶을까요?"
"오호, 자네가 수육까지? 아이구, 이장 노릇 하길 잘했어. 동네 잔치가 아주 풍성해지겠구만."
덕수는 만족스러운 듯 허벅지를 탁 쳤다. 창밖으로 부는 바람에 마당의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날씨는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지만, 카페 안의 공기는 따스하기만 했다.
지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여마셨다. 코끝을 스치는 커피 향과 덕수의 텁텁한 담배 연기 냄새가 묘하게 섞였다. 완벽하게 독립된 공간은 아니었다. 때로는 시끄럽고, 때로는 귀찮은 간섭이 오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 진정한 평화가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도망쳐 숨어든 유배지가 아니었다. 자신이 스스로 뿌리를 내린 온전한 집이었다.
"커피 다 식겠어요, 이장님."
"아이고, 이야기에 팔려서 식는 줄도 몰랐네."
덕수가 남은 커피를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빈 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 저녁에 회관에서 보조 밸브 점검 좀 하니까 알고 있으라고. 배관 안 얼게 단단히 조여야지."
"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덕수는 밀짚모자를 다시 눌러쓰고는 밖으로 나섰다. 문이 닫히며 자그마한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지수는 창가로 다가갔다. 멀어지는 덕수의 뒷모습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지만, 지수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앞치마 주름을 털어내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카페 안의 불빛은 밤을 향해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