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시작을 꿈꾸며
가을볕이 창가로 옅게 스며들었다. 강원도의 아침 공기는 도시의 것과 달랐다. 서늘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풀 냄새가 콧속을 스쳤다. 민지수는 카운터 뒤에 서서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회색 셔츠 위에 두른 감색 앞치마의 끈이 허리에 단단하게 조여졌다. 카페 코너의 문을 열기 전, 그녀는 늘 이 짧은 적막을 즐겼다. 목재 테이블 네 개가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작은 액자들에는 가을 산의 풍경을 담은 지역 사진들이 걸려 있었고, 그 옆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투박한 수공예품 목각 인형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침 안개 속에 잠긴 창밖의 헐벗은 산 능선이 아늑한 실내와 대비를 이뤘다.
지수는 카운터 상판을 마른 헝겊으로 한 번 더 닦아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혼자 있는 게 익숙해요, 남들에게 참견받는 게 원래 좀 서툴고요."
어제 이사 트럭이 떠난 직후, 마을 회관 쪽에서 들리던 시끄러운 이웃들의 인사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마당에 턱하니 들이닥쳐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를 내려놓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흙이 잔뜩 묻은 감자를 불쑥 내밀며 집집마다 인사 다녀야 이 동네에서 살아남는다는 식의 충고를 늘어놓았었다. 굳이 사양했음에도 마당 한켠에 박스를 밀어 넣고 돌아가던 그 뒷모습은 지수에게 큰 부담이었다. 친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례한 관심들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녀가 이 깊은 산골까지 흘러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방해받지 않는 독립적인 삶,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온전한 고립.
지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카운터 한쪽에 놓인 그라인더를 점검했다. 원두 호퍼에 갈색 빛깔의 원두를 쏟아붓자 사각사각 소리가 고요한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콜롬비아산 원두였다. 캐러멜과 견과류의 단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과테말라의 은은한 스파이스 향이나 묵직한 바디감의 로부스타 블렌드를 쓸까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첫날의 시작은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향으로 채우고 싶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의 전원을 켜자 미세한 진동과 함께 보일러가 물을 끓이는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포터필터를 분리해 마른 수건으로 닦고, 적정량의 원두 가루를 담아 템퍼로 단단하게 다져냈다. 그룹헤드에 장착하고 버튼을 누르자, 뜨거운 물이 통과하며 짙은 갈색의 에스프레소가 가느다란 줄기를 그리며 작은 에스프레소 잔으로 떨어졌다. 그 위로 촘촘하고 부드러운 크레마가 곱게 형성되었다. 지수는 작은 스푼으로 크레마를 살짝 떠서 맛보았다. 묵직한 단맛 뒤로 은은한 산미가 혀끝을 부드럽게 감돌았다.
"음, 괜찮네."
커피 향이 실내의 퀴퀴한 옛 냄새를 완전히 지워내며 퍼져 나갔다. 창가로 천천히 걸어가자 바깥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산책길 옆에 조용히 자리 잡은 옛 사당의 지붕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그곳을 지나치며 향을 피우러 가는 마을 주민의 그림자가 보일락 말락 스쳐 지나갔다. 지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 멀리 보이는 미세한 인기척조차 그녀에게는 평화를 깨는 작은 자극이자 불안의 요소였다. 낯선 환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가슴 한구석을 차갑게 스쳐 지나갔다. 과연 이 산골 구석에서 완벽하게 숨어 지낼 수 있을까. 사람들이 호기심에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스스로 단단한 벽을 쌓으면 그만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완벽하게 끊어내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지수는 발걸음을 돌려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가을의 산골 마을은 겉보기엔 평화로웠지만, 그녀에게는 불필요한 시선들의 집합소일 뿐이었다. 손을 뻗어 출입문 상단의 묵직한 잠금장치를 찰칵 소리가 나도록 걸었다. 외부의 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첫 번째 단계였다.
이어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드리워진 두꺼운 마직 커튼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스르륵, 레일을 따라 암막 커튼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창문을 완전히 가려나갔다. 빈틈없이 닫히도록 모서리를 손으로 꾹꾹 눌러 고정하는 손길은 거의 강박적이었다. 바깥의 풍경과 낯선 시선들이 일시에 차단되자,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환하던 실내는 따뜻하고 아늑한 주황빛 할로겐 조명 아래로 깊게 가라앉았다. 외부와의 모든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지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바깥의 새소리나 바람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오직 커피 머신이 뿜어내는 미세한 온기와 원두의 고소한 향만이 이 작은 공간을 온전히 지배했다.
그녀는 완벽한 방음과 차단 속에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뱉었다. 카운터로 천천히 돌아와 아까 내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었다.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액체가 목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이 작은 공간, 철저하게 혼자가 된 이 밀폐된 평화야말로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이었다. 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완벽하게 고요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