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을 통한 구원
비상계단 아래로 이어지는 암흑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삼키려는 거대한 입이었다. 나는 박 대장이 남긴 부서진 틈새를 빠져나와 이나를 재촉했다.
"정신 차려! 여기서 쓰러지면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갈라져 있었지만, 지금은 주저앉아 감정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블록버스트 파동이 남긴 전자기 잔류 탓에 손목에 찬 통신기는 이미 액정이 깨진 채 지직거리는 소음만 흘리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전자 장치가 기능을 잃어버린 현장은 고요함 대신 기괴한 금속 마찰음으로 가득했다. 건물의 척추가 부러지는 소리가 철근을 타고 머리 위로 쏟아졌다.
이나는 흐트러진 안경을 치켜올리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데이터상으로 붕괴 속도가 20% 상승했습니다. 서둘러야 해요. 이대로 가면 지하 40미터 하부 코어의 메인 제어반이 완전히 폭주할 거예요."
"메인 제어반? 거기로 내려가는 길은 이미 무너지지 않았나?"
"내 실수 때문에 다들 위험해졌어... 내가 만든 장치야...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이나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설계한 도시 전력망의 피드백 오류가 이번 재난의 원인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논리와 데이터로만 세상을 통제하려던 연구원이 눈앞의 참혹한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오만함 대신 타인을 살리겠다는 절박한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우리가 도달한 곳은 빌딩 지하 3층,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들이 교차하는 구조 지지대였다. 그곳은 이미 정상적인 형태를 잃고 있었다. 블록버스트 고출력 전자기 파동이 금속 결합을 일시적으로 파괴하면서, 건물의 하중을 지탱해야 할 대형 철근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바닥은 진동으로 요동쳤고, 공기 중에는 유해 가스와 매캐한 연기가 가득찼다. 내가 입고 있는 고온 방호 소방복의 센서가 경고음을 울려댔다.
- 투두둑, 삑- 삑-
탄소 섬유와 내열 세라믹으로 이루어진 12kg 짜리 방호복은 극한의 열과 가스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부 자동 냉각 시스템이 한계치에 달했다는 붉은 경고등이 헬멧 내부 시야각을 점멸하고 있었다. 방호복의 방호 한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앞서 진입할 때 느꼈던 미열은 어느새 피부를 에는 듯한 작열감으로 변해 있었다. 이 상태라면 10분을 버티기 힘들었다.
"강 준혁 씨, 저길 보세요."
이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지하 코어로 향하는 마지막 비상 통로가 있었다. 하지만 그 통로를 받치고 있는 메인 지지 하중 구조물이 이미 반으로 쪼개져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그 위로는 대피해야 할 시민 수십 명이 발을 구르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민 자율 구조 네트워크를 통해 모인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전원, 10분 내로 탈출한다. 내 지시에 따라 움직여!"
나는 목에 핏발을 세우며 위를 향해 소리쳤다. 시민들이 비좁은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고 울먹이며 지하 계단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들의 손을 잡아끌며 단 한 명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난 괜찮아. 저 사람들을 먼저 옮겨."
부상 입은 시민을 부축하려던 청년이 내게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그의 어깨를 강하게 밀어 올려 이나의 쪽으로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호복 내부의 온도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땀이 비 오듯 흘러 눈을 찔렀고, 호흡은 점점 가거칠어졌다. 흉부의 압박감이 심해지면서 머리가 핑 돌아갔다. 이것이 내 방호복이 버틸 수 있는 물리적 한계였다. 완벽한 훈련과 체계적인 대응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신념이, 이 허술한 방호복의 과열과 함께 으스러지고 있었다.
마지막 시민이 이나의 유도에 따라 지상으로 이어지는 비상 통로로 완전히 빠져나간 순간이었다.
- 쿠웅!
머리 위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하부 코어의 피드백 오류가 일으킨 2차 파동이었다. 그 충격으로 시민들이 빠져나온 비상 통로 바로 아래의 주 지지대가 완전히 부서지며 주저앉았다. 이대로라면 통로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방금 탈출한 시민들까지 모두 지하로 매몰될 판이었다.
"안 돼...!"
이나가 경악하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녀가 그 구조물을 수동으로 고정하려 손을 뻗었지만, 2톤이 넘는 철골의 무게를 인간의 힘으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이나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내며 그 아래로 뛰어들었다.
"준혁 씨! 뭐 하는 거예요! 당장 나와요!"
이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나는 부서져 내리는 철근 기둥 밑에 몸을 밀어 넣었다.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고온 방호 소방복의 외피가 고열에 녹아내리며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부 냉각 시스템은 이미 완전히 꺼져 버렸고,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경을 타고 밀려왔다. 시야가 하얗게 멀어졌다. 호흡을 할 때마다 뜨거운 유독가스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팔로 꺾인 철골을 악물고 붙들었다. 내 체중과 방호복의 남은 강도를 짜내어 무너지는 하중의 중심을 겨우겨우 지탱했다.
"이나... 씨... 서둘러. 연결 장치를... 분리해."
내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완벽한 영웅이 되고 싶었던 지독한 죄책감과 책임감이 비로소 실체 없는 무거움을 벗어던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겠다는 원함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버티는 몇 초의 시간이 저 아이와, 저 시민들과, 그리고 이나에게 살아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이 될 터였다.
"안 돼요... 당신까지 죽을 거야!"
이나는 눈물을 흘리며 내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무너지는 낙진과 파편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더 이상 논리와 데이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녀는 제어반의 수동 분리 레버를 향해 몸을 던졌고, 마침내 연결 장치를 강제로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 웅-- 우웅---!
도시 전체를 울리던 블록버스트의 기괴한 진동음이 뚝 끊겼다. 하부 코어의 폭주가 멈추고, 주저앉던 건물의 붕괴 속도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완전히 안전해졌다. 저 멀리 밖에서 들려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이나의 부축을 받으며 대피하던 시민들이 무너진 틈새 너머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눈속에 담긴 것은 절망이 아니라 생명의 온기였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철골을 붙든 채, 서서히 감겨오는 눈꺼풀을 힘주어 버티려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았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생명들이 저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내 안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지만, 그 희생의 끝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희망의 공기가 내 폐부를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입꼬리를 미소처럼 말아 올리며, 마침내 그 무거운 어둠 속으로 온전히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