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녹은 길과 평온한 아침
아침 햇살이 눈 쌓인 마당 위로 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어젯밤까지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카페 코너의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설원은 눈이 부실 정도로 고요했다.
민지수는 빗자루를 들고 카페 앞마당으로 나왔다. 밤새 내린 눈이 발목까지 차올라 제법 묵직했다. 마당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은 겨울철 산골 마을의 당연한 일과였다. 그녀는 앞치마 끈을 단단히 고쳐 매고는 마당 한켠부터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서걱거리는 빗자루 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깨웠다.
폭설이 지나간 뒤의 공기는 유난히 상쾌했다. 차가운 기운이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마을 쪽에서 투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에 밀짚모자를 쓴 강덕수가 익숙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손에 커다란 삽을 들고 있었다. 덕수는 지수를 힐끗 보더니 마당 입구에 멈춰 섰다.
"여보쇼, 지수 양. 아침부터 부지런도 하구먼."
덕수가 목도리를 툭툭 털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예전처럼 퉁명스럽지 않고 은근히 너그러웠다. 지수는 빗자루를 멈추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장이시네요. 일찍 나오셨네요."
"일찍 나오긴 뭘 일찍 나와. 이 동네는 눈 오면 이장부터 삽 들고 뛰어나와야 되는 팔자여. 자네 혼자 이걸 다 치우려면 점심때까지도 모자라겠어."
덕수는 그렇게 말하며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굵직한 손으로 삽을 쥐고 눈을 툭툭 퍼내기 시작했다. 투박하지만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지수는 그가 자신을 도와주러 온 것을 알고 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덕수는 물 공급 규칙을 앞세워 그녀를 압박했고, 지수는 그런 간섭이 싫어 암막 커튼을 치고 벽을 쌓았다. 하지만 어제 눈보라 속에서 어르신들을 대접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 단단하던 벽에 금이 갔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빗자루가 눈을 쓸어내는 소리만 났다.
마을 주민 몇 명이 대피소였던 카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들은 지수를 보자마자 멈춰 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이고, 지수 양 덕분에 어제 아주 따뜻하게 잘 보냈소."
"보리차도 아주 구수하니 좋더만. 고마워요."
주민들의 갑작스러운 인사에 지수는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여전히 타인의 다정한 시선이나 감사의 인사가 익숙하지 않았다. 과거 도시에서 상처를 입고 이곳으로 도망쳐 온 이유도 바로 그런 관계의 피곤함 때문이었다. 지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별것도 아닌데요 뭐. 날씨가 추워서 다들 고생하셨죠."
"아유, 별것긴 왜 별것이야. 이 양반이 참 성정도 곱지."
주민들은 껄껄 웃으며 눈길을 마저 걸어갔다. 지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마른침을 삼켰다. 고립을 자처하던 자신에게 건네진 온기가 아직은 낯설고 어쩐지 가슴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덕수가 삽을 멈추고 지수를 쳐다보았다. 덕수는 깊게 패인 눈가로 지수를 유심히 보더니 툭 내뱉듯 말했다.
"왜유, 동네 사람들이 고맙다는데 얼굴이 벌게져선."
"그냥…… 이런 인사가 아직은 좀 서툴러서요."
지수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자, 덕수는 피식 웃으며 밀짚모자챙을 치켜올렸다.
"서툴긴 뭐가 서툴러. 자네도 이제 이 동네 사람이 다 됐는데. 어제 그 눈보라 속에서 노인네들 받아준 사람이 누군데 그러남."
"그건 그냥……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당연한 일이라……."
덕수는 나지막이 읊조리더니 마당의 눈을 한 움큼 퍼내어 길가로 던졌다. 그리고는 잠시 숨을 고르며 지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사실 이 동네에 젊은 사람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 나도 걱정이 많았어. 금방 도시로 도망칠 뜨내기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가 좀 깐깐하게 굴었던 것도 있고."
지수는 덕수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게 왜 그토록 엄격했는지, 수도 밸브를 잠그며 규칙을 강요했던 진짜 이유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번에 보니까 아니더라고. 자네는 그냥 겉치레로 카페 차린 게 아니었어. 이 카페가 말이지, 우리 마을에 생긴 이후로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옛날에는 다들 각자 집구석에 박혀서 겨울 나기 바빴는데, 이제는 이 카페 앞에 모여서 안부를 묻잖아."
덕수의 투박한 목소리가 아침 공기 속에 낮게 울려 퍼졌다.
"카페 코너…… 이 이름 그대로야. 이제 이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코너가 됐어. 중심 말이야."
그 말은 생각보다 훨씬 깊게 지수의 마음에 박혔다.
마을의 중심. 누구와도 섞이지 않고 혼자만의 평화를 지키려던 요새가, 언제부턴가 이 산골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는 따뜻한 쉼터가 되어 있었다.
지수는 더 이상 자신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언제나 방어막을 치고 타인을 밀어내려 했지만, 사실은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수는 가만히 손에 쥐었던 빗자루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카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게 유리창을 가로막고 있던 암막 커튼은 이미 어제 완전히 걷혀 있었다. 어두컴컴했던 실내는 이제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토록 집착하던 '혼자만의 평화'라는 이름의 닫힌 문과 커튼은 이제 흔적조차 없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통유리 너머로 목재 테이블과 잘 정리된 카운터가 투명하게 보였다.
지수는 가슴속에서 무언가 묵직한 돌덩이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겨울바람은 여전히 옷깃을 스쳤지만, 마음만큼은 봄날처럼 포근했다.
"그렇네요."
지수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덕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가시나 냉소 대신 홀가분한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도 자주 들러주세요, 이장님. 맛있는 커피는 언제든 준비해 둘 테니까요."
덕수는 그 대답에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자네가 타주는 그 진한 커피 맛은 내가 인정하지. 오늘은 내가 먼저 첫 손님으로 들어갈 테니까, 불이나 피워놓으라고."
덕수는 삽을 마당 한쪽에 툭 기대어 세우고는 카페 문을 향해 성성걸걸 걸어갔다. 지수는 그런 덕수의 뒷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앞치마의 주름을 반듯하게 펴고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카페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고소한 원두 냄새와 함께 따스한 온기가 밀려 나왔다. 지수는 더 이상 숨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당당한 마을의 일원으로서, 평온한 아침의 문을 활짝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