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수의 결단
이나의 손을 잡고 로비를 빠져나온 우리는 비상계단을 타고 15층으로 향했다. 다부진 체격과 화재 현장의 그을음이 묻은 내 뺨 위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비상등의 주황색 불빛은 건물 전체를 휘감은 진동 때문에 위태롭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블록버스트 현상으로 인한 붕괴 압박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 서서히 우리를 조여오고 있었다.
"데이터상으로 붕괴 속도가 20% 상승했습니다. 이대로라면 10분도 안 남았어요. 서둘러야 해요."
이나는 흐트러진 안경을 치켜올리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도시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극도의 불안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자책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내겐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무거운 책임감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여기서 쓰러지면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나는 이나를 다그치듯 외치며 복단 끝에 위치한 방화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15층 내부 복도는 이미 천장에서 떨어진 콘크리트 잔해와 뒤틀린 철근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매캐한 분진 냄새와 타버린 전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때, 무너진 벽 틈새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깊게 패인 주름과 오른쪽 손목에 감긴 붕대. 소방서 5대대를 이끄는 박태수 대장이 부서진 석고보드 더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날카롭지만 피로한 눈매가 나와 이나를 향했다.
"대장님! 여기에 고립되어 계셨습니까."
"준혁아, 무리하지 마라. 현장은 오늘만 있는 게 아니야. 건물 전체의 하중이 15층 지점에 집중되고 있어. 당장 철수해야 한다."
박 대장은 낮고 굵직한 음성으로 우리를 향해 경고했다. 팀원들의 생존과 안전한 철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의 매뉴얼대로라면,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물러설 수 없었다. 지하 40미터 하부 코어의 메인 제어반을 손보지 않으면, 이 빌딩뿐만 아니라 주변 일대가 통째로 무너질 판이었다.
"대장님, 물러설 시간이 없습니다. 이나가 말했어요. 붕괴 원인은 지하 코어의 제어반 피드백 오류입니다. 저와 이나가 아래로 내려가 메인 제어반을 분리해야 합니다."
내 말에 박 대장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하를 사지로 내몰 수 없다는 고독한 중압감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사정은 알겠지만, 지금은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해. 게다가 이미 아래쪽 계단실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너희 둘이 내려갈 길은 없어."
"내가 만든 장치야...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이나가 앞으로 나서며 다급하게 외쳤다. 자신의 지식과 데이터로 이 재난을 바로잡겠다는 오만함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두려움과 절박함만이 그녀의 목소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건물 전체가 다시 한 번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우두둑 하는 철골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올라온 15층 비상계단 쪽 복도가 거대한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폭삭 주저앉았다. 바닥이 아래로 푹 꺼지며 나와 이나를 지탱하던 콘크리트 조각들이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다.
"위험해!"
박 대장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내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겨우 벽면에 등을 기달 수 있었지만, 눈앞의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다. 탈출로가 사라진 것이다. 매캐한 먼지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젠장... 길이 막혔어."
내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리는 사이, 박 대장은 무너진 통로 너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대장은 끝까지 살아남아 부대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려는 듯, 천천히 손목의 붕대를 조였다.
"대장님?"
"준혁, 우리가 선택한 길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우리가 죽는 게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막힌 통로를 열어 지탱해야만 너희가 내려갈 수 있어."
박 대장의 음성은 더 이상 상급자의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현장을 지켜온 선배이자 동료가 건네는 마지막 유언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당장 무슨 소리십니까! 같이 내려갑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내 걱정은 마라. 너라도 살아서 돌아가야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만들지 않겠다는 그 눈빛, 나도 30년 전에 가졌던 거다. 가라, 준혁아. 시간이 없다."
박 대장은 나를 힘껏 밀쳐내며 무너져 내리는 철근 구조물 아래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양손으로 비틀린 H빔을 붙잡고 전신의 힘을 짜내자, 기적처럼 막혀 있던 통로의 틈새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하중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며 핏줄이 터져 나왔다.
"대장님! 안 됩니다! 제발!"
"서둘러... 제어반을 멈춰라..."
박 대장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건물이 다시 한 번 2차 파동의 전조를 품고 격렬하게 진동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나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가자."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형체도 없이 으스러져 있었다. 나는 박 대장의 희생으로 겨우 열린 비좁은 틈새를 향해 이나를 밀어 넣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그가 짊어진 무게와 그 부서져 가는 등 뒤로 느껴지는 절망감은 내 심장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커다란 낙인을 찍고 있었다.
탈출로는 확보되었으나, 내 안의 무언가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완벽한 통제라는 미련한 신념이 깨진 자리에는 타인을 구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죄책감만이 차갑게 고여들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어둠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