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긴 수돗물과 서늘한 경고
가을볕이 산등성이를 넘어 카페 코너의 유리창을 비추고 있었다. 지수는 단정한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카운터 뒤에 섰다. 흰 셔츠에 매듭이 야무진 앞치마는 오늘도 구김 하나 없었다. 오전 아홉시, 카페를 공식적으로 여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아침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려 입안에 털어 넣었다. 진하고 쓴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혼자만의 고요 속에서 마시는 커피는 완벽했다. 타인의 방해만 없다면 이 산골 생활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지수는 오늘 장사를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 예열을 시작했다. 머신 내부 보일러가 웅웅거리며 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힘차게 뿜어져 나와야 할 소리가 잦아들더니, 펌프가 헛도는 듯한 마른 소음만 울렸다.
"뭐지."
지수는 미간을 좁히며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촤악 하는 경쾌한 물소리를 기대했지만, 들려온 것은 콧김 새는 듯한 바람 빠지는 소리뿐이었다. 물줄기는 비틀거리듯 몇 방울 툭툭 떨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파이프 안에서 무언가 켁켁거리는 메마른 진동만 전해질 뿐이었다.
지수는 당혹스러움에 젖은 눈으로 수도꼭지를 몇 번 더 잠그고 열었다.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카페 코너의 모든 설비는 마을 공동 상수도에 연결되어 있었다. 어제 오후에 이사 와서 잠시 손을 씻을 때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터라 당황스러움은 배가 되었다. 커피 머신을 세척하고 잔을 씻으려면 지금 당장 물이 필요했다.
그때 가게 바깥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투박한 구두 소리가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지수는 반사적으로 카운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제 그녀의 평온을 사정없이 깨부수었던 그 이장의 발소리임이 분명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카페 옆 마당의 수도 계량기 함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는 참지 못하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 달아두었던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내자, 창밖으로 밀짚모자를 눌러쓴 강덕수의 등이 보였다. 그는 쭈그려 앉아 수도 계량기 옆에 설치된 파이프 밸브를 손수 꽉꽉 조이고 있었다.
지수는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가을의 서늘한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덕수는 깜짝 놀라지도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굳은 다부진 입술이 드러났다. 그는 일어서며 흙이 묻은 투박한 손으로 밀짚모자의 챙을 툭툭 털었다.
"아, 기어코 문을 열고 나오는구먼. 어제 내가 인사하러 왔을 땐 그렇게 꽁꽁 숨어 있더니."
"남의 가게 설비를 마음대로 건드리시는 이유가 뭡니까? 예고도 없이 물을 끊어버리면 저는 장사를 어떻게 하라고요."
지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곧추섰다. 그녀는 언제나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고, 참견을 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사 온 지 이틀 만에 마을 이장이란 사람이 영문도 모를 횡패를 부리고 있었다.
덕수는 지수의 날 선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마을 아래쪽을 턱짓으로 가르켰다.
"여보쇼, 이 동네 규칙은 제대로 알고 카페를 연 거요? 지금 이 산골 전체가 비상이야. 가을 가물어서 저수지 바닥이 말라가는 판에, 대도시에서 온 양반이 이렇게 대용량으로 물을 펑펑 써대면 아래쪽 밭농사 짓는 집들은 어쩌라는 거요."
"제가 언제 물을 펑펑 썼다고 그러십니까. 이제 겨우 아침 영업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리고 제 카페에서 쓰는 물은 제가 정당하게 대가를 치르고 쓰는 겁니다."
지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덕수를 노려보았다. 대가를 치른다는 말에 덕수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그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지수를 가리키며 혀를 찼다.
"돈 몇 푼 내면 다 되는 줄 알지? 여긴 도시가 아니야. 물이라는 건 이 마을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아껴 쓰고 나눠 쓰는 생명수 같은 거란 말이야. 혼자 살겠다고 이 구석에 들어와서 남들 피해주지 말고, 동네 규칙부터 똑바로 익히슈."
"규칙이요? 제가 언제 그쪽 규칙에 동의라도 했습니까? 이건 명백한 영업 방해이자 재산권 침해예요. 당장 밸브 열어 놓으세요."
지수는 참았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녀의 원함은 오직 하나,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이 공간에서 온전히 혼자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노인은 그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 짓밟고 있었다. 타인에게 마음을 닫아버려야 비로소 안전하다는 그녀의 오랜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덕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오늘 오전엔 공급 시간 지났어. 당장 쓰겠다고 떼를 써도 소용없어. 앞으로 이 카페는 정해진 시간 외에는 물 쓸 생각 말어. 특히 이렇게 대낮부터 커피 뽑는다고 물을 흘려보내는 건 절대 못 봐주니까."
"이거 정말 무법천지 아니에요? 경찰을 부르든 면사무소에 항의를 하든 할 테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당장 이거 열어요!"
지수가 덕수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잠긴 밸브를 직접 손으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덕수가 한발 앞서 몸으로 계량기 함을 가로막았다. 그의 단단한 어깨는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묵직했고, 오랜 농사일로 다져진 손은 거칠 틈이 없었다.
"허허, 이 양반 성격도 참 불같네.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나. 다 마을을 위한 일이니까 나이 먹은 사람 말 좀 들어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이장님이 뭔데 남의 영업을 이래라저래라 간섭이에요?"
지수는 덕수의 단단한 등 뒤로 보이는 잠긴 밸브를 바라보았다. 머신 안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기계음마저 완전히 멈춰 있었다. 완벽하게 차단된 고요와 평온을 누리려던 그녀의 계획은, 이 투박하고 꽉 막힌 노인네의 손에 의해 무참히 박살 나고 있었다.
덕수는 지수의 서늘한 분노 어린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밀짚모자 아래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내일부터 오전 여섯시랑 저녁 일곱시, 딱 두 번만 물이 나올 거요. 그 전에 물통에 미리 받아두든 알아서 하슈. 이만 가볼 테니까 억울하면 마을 회관으로 찾아오든가."
덕수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뒤돌아 엉성한 걸음으로 산길 아래를 향해 성성히 걸어 내려갔다. 그의 등 뒤로 가을바람이 휑하게 불었다.
지수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멀어져 가는 덕수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주먹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떨려왔다. 낯선 산골 마을의 차가운 현실이 그녀의 단단한 성벽을 정면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지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쾅, 하고 출입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잘게 부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