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도시인, 머무는 마을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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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커피 한 잔에 담긴 진심

지수는 카운터 안쪽으로 물러나 앞치마 매듭을 다시 고쳐 묶었다. 평소라면 혼자 조용히 커피를 내리거나 책을 읽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작은 목재 테이블 네 개는 눈을 피하러 온 마을 어르신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의 지수는 그 어색함을 감추려 에스프레소 머신 점검을 시작했다.

"추운데 먼 길 오셨네요. 보리차는 조금 더 끊여드릴게요."

지수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전자 상태를 확인했다. 어르신들은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며 한숨을 돌렸다. 덕수는 그런 지수를 힐끗 바라보다가 무릎 위에 올려둔 거칠고 투박한 손을 문질렀다.

"아이고, 지수 양. 오늘 진짜 살았구먼. 이 눈길에 이장 아니었으면 우리 영영 얼어 죽었을 겨."

창가에 앉은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덕수는 그 말에 멋쩍은 듯 굵은 목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려.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지."

지수는 그 대화를 들으며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솔직히 말해 어제까지만 해도 덕수에게 가진 감정은 적대감에 가까웠다. 카페 코너의 수돗물이 끊겼을 때, 지수는 그것이 외부인인 자신을 향한 마을의 은근한 따돌림이라고 여겼다. 매일 오전 6시와 저녁 7시에만 물을 공급한다는 규칙 역시 자신을 길들이려는 이장의 횡포로만 보였다.

하지만 눈보라 속에서 어르신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덕수의 등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가 회관에서 부침개를 부치며 슬쩍 건넸던 사과를 떠올리면 마음이 조금씩 복잡해졌다.

"어르신들, 차 나왔습니다."

지수는 찻잔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덕수의 앞에 찻잔을 놓으려 할 때, 덕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수 양. 아까부터 이리 쳐다보는 걸 보니 내한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네."

덕수의 투박한 사투리가 카페 안에 낮게 울렸다. 지수는 순간 손을 멈추고 반듯한 시선으로 덕수를 마주보았다. 피하고 싶었지만,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앉아 있으니 그동안 쌓였던 의문을 풀고 싶기도 했다.

"할 말이라기보다는…… 조금 궁금한 게 있었어요."

지수는 카운터 모서리에 가볍게 손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차분하지만 약간의 냉소가 섞인 목소리였다.

"제가 이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됐죠. 그래서 이 동네 규칙도 아직 서툴고요. 하지만 수돗물 공급을 그렇게 엄격하게 제한하는 이유가 정말 궁금했어요. 혹시 제 카페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었고요?"

카페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어르신들은 마시던 차를 멈추고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덕수는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려다가 탁자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의 깊게 패인 주름 사이에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거 참, 오해를 해도 유분수지.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은 영감탱이로 보였나?"

"제 개인적인 사정은 굳이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다만, 물이라는 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기본인데 그걸 갑자기 잠가버리니 저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지수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동안 혼자서 겪었던 고립감과 답답함이 불쑥 튀어나왔다.

덕수는 화를 내는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밀짚모자를 다시 집어 들고 손으로 꾹꾹 눌러썼다.

"자네가 몰라서 그라는 걸 내가 모르는 건 아니여. 하지만 이 산골 동네 사정을 좀 보라고. 여기 물탱크는 시내처럼 대형 정수장에서 콸콸 나오는 게 아니야. 골짜기 안쪽에서 내려오는 자연 계곡물에 의존하는 거지."

덕수의 투박한 손끝이 창밖의 하얀 산을 향했다.

"지금처럼 겨울이 오고 한파가 들이치면 배관이 얼어 터지기 일쑤요. 물을 그냥 두면 하루 아침에 마을 전체가 단수되는 판국이라고. 그래서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어붙은 밸브를 녹이고 점검하러 돌아다니는 거요. 내 영광보려고 그 고생을 하는 줄 아나."

지수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수돗물 공급 규칙이 단순한 텃세나 괴롭힘이 아니라, 마을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배관이…… 얼어 터진다고요?"

"그럼. 작년 재작년에도 영하 십오 도 떨어지면 온 마을이 며칠씩 물 한 방울 못 마시고 고생했어. 올해는 특히 눈이 많이 와서 내가 밤낮으로 산등성이 밸브를 확인하러 다녔지. 카페라고 예외로 둘 순 없잖나. 한 곳에서 몰래 물을 쓰기 시작하면 다른 집이 당장 피해를 보니까."

덕수의 말에는 억울함이나 변명보다는 묵직한 책임감이 묻어났다. 그는 젊은 이주민들이 마을의 전통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지만, 지수 역시 마을의 현실을 전혀 모른 채 제 불만만 앞세웠던 셈이었다.

지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독립과 자유는 어쩌면 타인의 노력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있던 편의에 불과했던 걸까.

"제가…… 몰랐어요."

지수가 목소리를 낮추며 시선을 피했다. 단정한 단발머리 아래로 뺨이 살짝 붉어졌다. 타인에게 마음을 닫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던 자신의 태도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덕수는 지수의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툭 내뱉듯 말했다.

"뭐, 도시서 온 양반이 이런 골짜기 사정을 어찌 알겠어. 내가 처음에 좀 퉁명스럽게 군 것도 있겄지. 이 동네 젊은 사람들 다 나가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만 남아서 지키다 보니, 외부 사람이 들어오면 혹시라도 사단이 날까 봐 조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고."

덕수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나도 원래는 젊었을 때 도시 나가는 게 꿈이었지.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 자리에 주저앉아서 지금까지 이 마을 건사하고 사는 거요. 자네가 여기서 커피를 내리든 뭘 하든, 나는 이 마을이 무사했으면 그뿐이야."

카페 안에는 다시 부드러운 차 향기와 함께 잔잔한 침적이 흘렀다. 어르신들은 두 사람의 대화가 원만하게 풀리는 것을 보고 다시 웅성거리며 보리차를 마셨다.

지수는 천천히 카운터 바깥으로 걸어 나와 덕수의 테이블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차가운 경계심이나 냉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툭 떨어져 나간 홀가분함이 감돌았다.

"이장님."

"왜 그라나?"

"커피…… 좋아하세요?"

지수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덕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내가 뭐 그런 쓴 커피를 알겄나. 그냥 믹스커피가 최고지."

"그럼, 오늘은 특별히 제가 만든 핸드드립 커피 한 잔 내려드릴게요. 쓴맛만 나는 게 아니라 고소하고 단맛도 나니까 드셔보세요."

지수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없던 다정함이 묻어났다. 덕수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 이 양반이 내 입맛을 다 맞추려고 그러네. 좋아, 한 번 맛이나 보십시다."

지수는 주방 안으로 들어가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드립퍼 위에 가루를 담고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부어내자, 카페 안 가득 깊고 진한 커피 향이 퍼져나갔다. 바깥의 눈보라는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이제 차가운 위협이 아니라 아늑한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지수는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를 찻잔에 담아 덕수의 앞에 놓아두었다. 덕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향을 맡았다.

"향은 참 좋네."

"천천히 드세요."

지수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덕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창밖으로 하얗게 쌓인 눈길 위로, 마을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들이 서로 얽혀 길을 만들고 있었다. 지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마침내 자신이 이 산골 마을의 차가운 눈밭 한가운데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공동체의 한가운데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실감했다. 적대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은근한 연대감이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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