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거리, 어색한 재회와 고백
카페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봄의 볕이 강남역 인근 거리 위로 쏟아진다. 오후 세 시의 도심은 바쁘게 움직이는 발걸음들로 가득하다. 은하는 손에 쥔 태블릿을 가방에 단단히 넣는다. 액정 위로 번진 갈색 얼룩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일그러진 선들은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세계였다. 그 세계가 한순간의 부주의로 무너져 내렸다.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지만 이내 깊은 한숨으로 흩어진다. 화를 내기에는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된 상태다.
가로수 아래를 느릿하게 걸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거리의 작은 플라워 스탠드에서 은은한 프리지아 향기가 바람을 타고 스친다.
"저기요, 잠시만요."
익숙하고도 다급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은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아까 카페에서 서류를 가방에 구겨 넣듯 사라졌던 그 남자가 서 있다. 최준호. 깔끔한 댄디컷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흐트러져 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은하의 앞에 멈춰 선다. 스마트폰을 쥐고 있던 손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멈춘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 다행히 멀리 안 가셨네요."
준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친다. 그의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이 번잡한 거리와 어우러져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은하는 나긋하지만 분명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손가락 끝에 아직도 마르지 않은 커피 얼룩이 끈적하게 남아 있다.
"저한테 아직 할 말씀이라도 남으셨나요?"
은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지만 선이 분명하다. 준호는 잠시 머뭇거리며 마른기침을 한다. 늘 논리적이고 빠른 소통을 중시하던 사람답지 않게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이내 빼내며 시선을 피한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통화가 너무 급해서 주변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어요."
준호의 사과는 형식적이기보다 꽤 당혹스러워 보였다. 그는 가방에서 아까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명함을 꺼내려다 멈춘다. 은하는 그의 행동을 말없이 지켜본다. 화를 내기엔 준호의 숨소리가 너무 가쁘고 지쳐 보인다.
"제 태블릿 액정이 망가진 건 그렇다 쳐도, 작업하던 파일이 전부 날아갔어요."
은하의 말 끝에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난다. 준호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온전히 깨달은 듯 입술을 깨물다. 그는 스마트폰 화면을 무의식적으로 힐끗 보려다 이내 화면을 꺼버린다.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수리 비용이나 데이터 복구 관련해서는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명함에 있는 번호로 연락 주시면..."
준호는 바쁘게 명함을 찾으려 품 안을 뒤진다. 은하는 그런 그의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 속에서 효율만을 쫓아 살아가던 사람의 피로가 보인다. 늘 트렌드를 읽고 성과를 내야 하는 마케터의 세계. 그곳 역시 은하의 고립된 작업실만큼이나 숨이 막히는 공간일지 모른다.
"됐어요. 명함은 이미 받았는걸요. 아까 제 작업물 위에 떨어졌으니까요."
은하의 목소리에 담긴 가벼운 자조에 준호는 멈칫한다. 그는 미안함으로 가득 찬 눈으로 은하를 바라본다. 거리의 소음이 두 사람 주변으로 멀어지는 기분이다. 가끔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만 요란하게 스쳐 지나간다.
"사실 제가 요즘 정신이 좀 없어서요. 왜 이렇게 소통이 안 되고 바쁘기만 한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길을 잃은 기분이 들 정도로 당황스럽네요."
준호의 입에서 튀어나온 솔직한 고백은 의외였다. 효율을 외치던 마케터의 입에서 나온 길을 잃었다는 말. 은하는 그 문장 속에서 자신과 닮은 구석을 발견한다. 혼자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면 안전할 거라 믿었던 자신의 고립감과 묘하게 겹쳐진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게만 느껴져서 저도 조금 힘이 드네요."
은하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나긋한 목소리에는 방어벽이 조금 허물어져 있다. 준호는 깜빡이는 눈으로 은하를 바라본다. 바쁘게 시계를 보던 눈빛은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의 공기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
"프리랜서로 일하시는 모양이네요.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하니 더 힘들셨겠습니다."
준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다. 날 선 긴장감이 사그라진 자리에 묘한 공감대가 스며든다. 은하는 가방 끈을 고쳐 잡으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다.
"결국은 사람을 향한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일도 관계도 말이에요."
은하의 말에 준호는 깊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스마트폰을 다시 꺼내지 않는다. 대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은하에게 시선을 맞춘다.
"죄송함을 만회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네요. 괜찮으시다면 근처 다른 카페에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준호의 제안에는 더 이상의 조급함이 없다. 은하는 망설이다가 수평선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커피는 이미 충분히 마셨으니, 다른 걸로 부탁드릴게요."
두 사람은 나란히 강남역 인근의 번잡한 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오해와 짜증으로 얼룩졌던 시작과 달리,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도시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봄볕이 따스하게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